7
두 가지 추측이 떠올랐다. 양다리를 걸쳤거나, 아니면 그냥 솜씨가 끝내주는 꽃뱀이거나.
시계바늘을 손가락으로 밀어서 네 바퀴 빙 돌린 것처럼 쏜살같이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에 나는 매우 드물게도 의욕 넘치는 모습으로 가방을 챙기고 옷을 입었다. 딱히 하릴없는 주말이었기에 힐즈에서 겪은 그 황당한 일을 꼼꼼히 되짚어볼 만한 시간은 충분했다. 모르는 일을 붙들고 혼자 낑낑대느니 차라리 부딪치고 보는 게 훨씬 나았다. 전정국 자존심과 가오가 있지. 김태형도 꿀릴 게 없으면 곧바로 대답해줄 것이고 뭔가 켕기는 게 있다면 입 꾹 다물고 설렁설렁 넘겨버릴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면 그건 진짜로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된다. 또는 '해버리면 그만'인 일이 된다.
아침 밥상머리에 해장국처럼 매운 고추를 송송 썰어넣은 콩나물국이 올라왔다.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갈 입에 넣으니 알싸하게 매웠다. 국을 떠먹고 있는데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남준이 형이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 아래 발끝으로 내 정강이를 쿡 찔렀다.
"너 예영이랑 깨졌냐?"
매운 국물이 목구멍으로 잘못 넘어갔다. 기침 때문에 입에서 튄 국물 몇 방울이 교복 바지에 똑똑 떨어졌다. 벌개진 눈을 치켜떴지만 맞은편 남준이 형의 표정은 나보다 훨씬 더 볼 만했다. 사촌동생 싸가지가 바가지라고 그 누나한테 한 소리 듣기라도 했나. 거실에 있는 엄마만 아니었더라면 벌써 우렁차게 사자후를 뽑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소시지부침에 젓가락을 찔러 넣었다.
"형 소식 진짜 느리다."
"야 얘기를 하지! 난 그것도 모르고 걔한테 니 얘기 했다가 후드려 맞을 뻔했잖아!"
"그 누나 얘기 하지 마. 나도 졸라 어이 없으니까."
니가 왜? 가로로 길게 째진 형의 눈이 소리없이 저렇게 묻는다. 나는 뭐 어처구니도 상식도 없는 머저리인 줄 아나. 서로 뒤통수 한 방씩 거하게 때려주었으니 그녀와 나의 스코어는 공평하게 일대 일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했으니 형이 그 사정을 알 리야 없었지만, 공연히 심술이 난 나는 잽싸게 마지막 남은 동그랑땡을 내 밥그릇 위로 낚아챘다. 나만큼 손이 날쌔지 못한 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빈 접시를 바라보았다. 쌤통.
교실에서 다시 만난 김태형은 아니나 다를까 완벽히 예전의 후줄근한 디폴트로 되돌아와 있었다. 날티가 풀풀 흐르던 가죽재킷에 워커, 심지어 안경 대신 렌즈까지 꼈던 그날 밤의 김태형은 어디 관짝에라도 집어넣은 것 같았다. 잘생김이 넘치는 얼굴을 여전히 필사적으로 감추고 다닌다. 이젠 쟤가 저러는 까닭을 좀 알겠다. 자기가 얼마나 잘났고 눈길 한 번만 던져줘도 다들 침 줄줄 흘리며 따라온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아니까 저러는 거다. 가끔 슬쩍슬쩍 보이던 재수없는 분위기는 역시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나는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수업시간에 곤히 퍼질러 자는 김태형을 흘겨보았다. 옆자리에서 김태형을 지켜보며 또 한 가지 알게 된 소소한 사실이 있는데, 얘가 가끔 졸 때 눈을 뜨고 잔다는 것이다. 그나마 검은자위가 있으면 그럭저럭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까딱 잘못해서 눈이 휘까닥 뒤집히기라도 하면 호러영화나 다름없는 광경이었다. 반만 뜬 눈이 허옇게 흰자위만 내보이고 있는 꼴이라니. 아무리 김태형이라도 그 모습은 좀 무서웠다.
김태형은 그 날따라 평소보다 심하게 빌빌거렸다. 간밤에 잠을 한 숨도 못 잔 사람처럼 수업은 물론이고 쉬는 시간에도 내리 잠만 잤다. 줄곧 책상 위에 엎드려 있다가 처음으로 자리를 비운 것이 점심시간이었다. 매점에 다녀와 보니 방금 전까지 제 자리에서 자고 있던 김태형이 보이지 않았다. 그새 도망갔나. 얼른 복도로 다시 나와서 두리번거리다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김태형이 저 아래쪽 화단 근처에서 나무 밑에 숨어 햇볕을 피하고 있었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더니 문득 고개를 쳐든다. 눈이 마주쳤다. 메추리알 만한 눈을 치켜뜨고 나를 올려다보던 김태형은 벌떡 일어나서 별관 쪽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도망가는 거다. 도망가는 게 확실하다.
나는 부리나케 뒤쫓아 나갔다. 일 분만에 화단 근처까지 내려가서 김태형을 찾으니 저쪽 별관 입구에서 얼쩡거리던 녀석이 나를 발견하고 허겁지겁 등을 돌렸다. 내 백 미터 전력질주의 최고 기록은 10.5초다. 그리고 김태형은 나보다 훨씬 발이 느렸다.
"어딜 도망가!"
"엄마!"
뒷덜미를 붙들린 김태형이 두 손으로 가슴팍을 감싸쥐며 호들갑스레 엄마를 외쳤다. 정말 안 어울린다. 나는 김태형의 생활복 뒷덜미를 움켜쥐고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물었다.
"우리 할 얘기가 좀 있지 태형아."
"없는데."
"금요일 밤에 힐즈에서 말이야. 좋아 보이더라."
"힐즈가 뭔데. 버버리힐즈?"
"싸울래?"
"아니."
"너 그 누나랑 언제부터 만난 거야?"
"무슨 누나?"
담 넘어가려는 구렁이의 목줄을 틀어쥐고 흔드는 꼴이었다. 나는 손아귀에 힘을 풀지 않고 김태형의 뒷덜미를 짤짤 흔들었다. 김태형은 숨막혀 죽는다고 결사적으로 버둥거렸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는 것도 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너 그 때 카페에서 누나 꼬신 거지! 햄버거 들이밀면서 꼬셨지?"
"꼬신 거 아니라니까!"
"뭐가 아냐 새끼야! 야시꾸리한 눈으로 쳐다볼 때 알아봤어! 너 나 엿먹이려구 그랬냐? 니가 보기에도 쫌 이쁘니까 뺏으려구?"
"아니라고!!"
온몸을 활어처럼 푸드덕거려 간신히 내 손에서 벗어난 김태형이 성난 얼굴로 돌아보았다. 에이씨 옷 다 구겨졌잖아. 구시렁거리며 쥐어잡혔던 옷깃을 툭툭 털어 정리한다. 기가 막히고 짜증이 치솟았다. 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내 입에서 방금 전까지 씹고 있던 껌덩어리가 튀어나갔다. 끈적끈적한 고무덩어리는 포물선을 그리며 우아하게 허공을 가로질러 김태형의 이마, 정확히는 눈썹을 다 덮을 만큼 자란 앞머리에 툭 떨어졌다. 헐. 내가 화들짝 놀라 얼어붙은 사이, 제 앞머리에 뭐가 달라붙었는지도 모르는 김태형은 이마에 껌딱지를 매달고 바쁘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허겁지겁 쫓아가 녀석의 어깨를 다시 붙잡았다.
"야 잠깐만."
"왜!"
"고개 좀 숙여봐."
"왜? 나 때리려고?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친구를 때리려고?"
"미쳤냐?"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한 내 얼굴에서 살기를 느꼈는지, 김태형은 두 팔로 머리통을 감싸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갑자기 우뚝 멈춰서더니 손을 내린다. 제 얼굴만한 손바닥을 쫙 펼치고 의아한 듯 들여다보던 김태형의 미간이 점점 굳어졌다. 나는 눈만 깜박였다. 김태형의 오른손바닥에 방금 내 입에서 발사된 껌딱지가 눌러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야, 이거 뭔데…… 김태형의 눈이 툭 치면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졌다. 두 손으로 머리통을 재차 더듬어 보던 김태형의 입이 이내 함지박만하게 벌어진다. 껌이 손가락에 짓눌려 앞머리에 더 단단하게 달라붙은 모양이었다. 김태형의 표정이 순식간에, 아주, 형용할 수 없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으로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게 뭐야……."
"……."
"전정국 이게 뭐야아!"
"니가, 니가 도망만 안 갔어두,"
"이거 어떡할 거야아아!"
김태형은 떼쟁이 세 살배기처럼 바닥에 두 발을 쾅쾅 구르며 울부짖었다. 뱃고동에 맞먹는 웅장한 사운드였다. 당황한 내가 손을 휘저어도 그치지 않았다. 지나가던 아이들이 전부 이 쪽을 쳐다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고함소리를 들은 체육선생이 청테이프를 둘둘 감은 각목을 휘적이며 별관 뒤쪽을 습격할 때까지.
두 시간 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수업도 빼먹고 화장실에 처박혀 있던 김태형은 종이 치자마자 부리나케 교실로 되돌아왔다. 정확히는 내 자리로.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며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내 자리로. 전세역전이었다. 껌과 물기가 뒤섞여 축축해진 앞머리는 결국 회생에 실패한 모양이다.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이마를 애써 한 손으로 가린 김태형은 우악스럽게 내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솔직히 머리채라도 잡을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약과였다). 새삼 얘 악력이 마른 몸에 비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왜, 왜."
"나랑 같이 좀 가자."
"어딜?"
"일단 가."
"……나 때리게?"
"아니 내 머리 책임지라고."
"어떻게?"
김태형의 등 뒤로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쭉 빼고 우리를 염탐하는 박지민이 보였다. 살려줘! 나는 입모양으로 열심히 뻥긋거렸으나 둔하기 짝이 없는 박지민은 무슨 소린지 못 알아먹은 눈치였다. 가끔 난감한 상황일 때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 좀 과하게 깜박여 주면 일이 잘 풀리던 것을 떠올리고 나는 장화 신은 고양이의 얼굴로 김태형을 올려다보았다. 젠장 씨알도 안 먹힌다. 녀석은 사정 봐주지 않고 나를 질질 끌고서 뒷산으로 올라갔다. 뿌리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손아귀 힘이 더럽게 셌다. 비쩍 마른 주제에 먹은 게 죄다 손아귀로 몰려갔나. 안 끌려가려고 버티는 나 때문에 산길의 흙바닥에는 내 신발자국만 처참하게 남았다.
한낮의 햇볕이 유난히 기승을 부렸다. 끌려가는 내 손바닥도, 앞서가는 김태형의 뒷목도 땀으로 축축해졌다. 어디 끌려가서 담배빵이라도 당하는 건가, 그런 생각까지 했을 즈음 우리는 힐즈에서 조금 떨어진 번화가의 상가 건물 앞까지 내려와 있었다. 김태형은 내 팔뚝을 단단히 잡고 3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땀범벅이 된 이마를 훔치며 유리문을 기세 좋게 밀어젖혔다. 동시에 상큼하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얼굴로 훅 끼쳐왔다. 퀴퀴하고 비좁은 인력업체 대신, 파마약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남아 있지만 깨끗하고 실내가 넓은 헤어샵이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중년여자 한 명과 젊은 남자 한 명이 각각 띄엄띄엄 자리를 차지한 채 머리에 약을 떡칠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뒤에 붙어 있는 앞치마 차림의 여자가 둘. 보라색과 카키색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머리색을 가진 그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김태형은 그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우렁차게 외쳐서 애꿎은 손님 두 명의 단잠을 깨우고 말았다.
"세진이 형!"
그러자 화장실인 줄 알았던 가게 안쪽의 작은 파란색 문이 열리더니 그 문을 도대체 어떻게 통과했을까 싶을 만큼 우람한 덩치의 남자가 나타났다. 얼핏 봐서는 미묘하게 김태우를 닮았다. 남자가 우리 앞으로 다가와 서자 정수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미용실을 가장한 조폭의 본거지였단 말인가…… 안경을 손가락으로 올려 고쳐쓴 남자는 저보다 한참 작아서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김태형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또 뭔 일이야. 넌 학교도 안 가냐?"
"형 제 머리! 머리 좀 손봐줘요!!"
"앞머리는 왜 그래?"
"얘가 그랬어요! 비용은 얘한테 청구하세요!!"
그러더니 뒤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를 손가락으로 척 가리킨다. 나를 힐끔 쳐다본 조폭 아니 미용실 원장인 듯한 덩치 큰 남자는 혀를 차며 김태형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헤집었다. 굵직한 손가락치고 상당히 섬세한 손놀림이었다. 껌 찌꺼기가 몹시 꼴사납게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몇 번 뒤적이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야 이건 어떻게 해결이 안 된다. 너무 달라붙어서. 잘라야 되겠는데?"
"농담이죠?"
"예쁘게 잘라줄 테니까 일단 앉아."
"형 씨발 이건 제 승부수란 말예요…… 띨빵하고 멍청해 보이잖아요…… 저 이제 어떡해요……."
"울지 말고 앉아 보라니까."
아빠가 사탕 안 사준다고 우는 유치원생 아들을 끌고 가는 것과 흡사한 모습으로 김태형을 데려간 원장은 솥뚜껑만한 손바닥으로 녀석을 거울 앞에 눌러 앉혔다. 그리고 하늘새 가운을 턱 아래에 꼼꼼하게 둘러주었다. 덩그러니 남은 내게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차마 도망가지도 못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로 눈치만 살피던 나는 미용사들의 시선에 못 이겨 슬금슬금 구석의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가위를 들던 원장이 나를 힐끔 돌아보고 말한다.
"거기 뒤에 사탕 있으니까 까먹어요."
청포도맛 사탕을 두 개째 으적으적 깨물어 먹고 있을 때에야 김태형의 앞머리 손질이 끝났다. 껌이 들러붙어 지저분하게 떡져 있던 머리카락이 시원하게 잘려 나갔다. 짙고 까만 눈썹이 드러나도록 앞머리를 뎅겅 자른 김태형은 울상을 못 지운 채 자꾸 거울을 들여다보며 이마를 매만졌다. 영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호섭이가 연상되긴 하지만 워낙 본판이 괜찮으니까 저것도 나름대로 봐줄 만한데, 하지만 눈치 없이 이런 소릴 꺼냈다간 언젠가 귀가길에 퍽치기라도 당하지 싶어 나는 말을 말았다. 그나저나 비용은 진짜로 내가 부담해야 하나. 기껏해야 앞머리니까 몇천 원 안짝이겠지만 김태형이 다짜고짜 끌고 나오는 바람에 지갑을 가져오지 못했다.
하지만 김태우를 미묘하게 닮은 덩치 큰 원장은 쿨했다.
"단골 서비스니까 오늘은 그냥 가라."
"아 뭔가 짧은데……형 저 진짜 안 이상해 보여요?"
"얘 지금 이상해 보여요?"
소파에 찌그러져 있는 나를 돌아보며 원장이 물었다. 이상하다는 단어의 첫 음절을 꺼내는 즉시 저 쇠뭉치 같은 주먹에 머리가 찌그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그리 괴악한 몰골도 아니었다. 김태형은 모르는 일이지만, 내게도 중학생 때 겉멋에 미쳐서 앞머리를 조금 잘랐다가 낭패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미용사가 실수였는지 어쨌는지 내 주문보다 훨씬 짧게 쳐버리는 바람에 한동안 학교 밖에서는 무조건 모자를 쓰고 다녔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 그 따위의 앞머리를 이고 다니느라 한동안 학교와 집에서 두문불출했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내 기분을 맞춰주느라 귀엽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남준이 형이 가끔 심심할 때 들춰내서 나를 놀리는 건덕지 중 하나였다.
봐, 니 친구도 괜찮다잖아. 시무룩한 김태형의 뒤통수에 대고 일갈한 원장이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검정 뿔테 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나를 한 번 훑어본다.
"혹시 어디서 저 만난 적 있지 않아요?"
왜 다짜고짜 작업 거는 대사를 치십니까.
"없는데요……."
"아닌데……어디서 분명 본 얼굴인데."
그럴 리가요 당신의 그 우람하고 특출난 덩치는 제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질 않는데요…… 골똘히 나를 들여다보던 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직도 거울 앞에 철썩 달라붙어 징징대는 김태형에게 매정하게 말했다.
"맘에 안 들면 앞으론 여길 오지 마 임마."
망설임 없이 파란 문짝 너머로 다시 사라지는 원장의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뒷모습. 나는 그제야 이 헤어샵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편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김태형은 두 손으로 얼굴을 몽땅 가리며―손가락이 너무 길어서 얼굴을 다 가리고도 한참 남았다― 깊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용실 바닥에 구멍이라도 뚫리는 줄 알겠다. 안녕히 계세요 누나. 나머지 미용사들과도 안면이 있었는지 제법 친근하게 인사한 김태형은 터덜터덜 가게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재빨리 뒤따라 붙으며 가장 무난하고 입에 발린 칭찬을 건넸다.
"야 이쁘네."
"뻥치지 마."
"진짜 이뻐."
"나 달래려고 구라 치지 마."
"아니 진짜라니까? 박지민도 보면 괜찮다고 할걸?"
아니었다. 김태형의 홀랑 잘려나간 앞머리를 본 박지민은 긴 눈을 좌우로 쭉 째어가며 신나게 웃었다.
"너 앞머리가 그게 뭐냐! 아핳하하!"
"경고하는데. 오늘 나한테 시비 걸지 마세요."
"와. 드릅나?"
"몰라 비켜."
저렇게까지 웃을 일인가……싶을 만큼 신나게 흐하흐하 웃어제끼던 박지민은 자꾸 이마를 가리려 드는 김태형의 손을 억지로 잡아뗐다. 눈이 아주 없어질 지경으로 웃고 있는데 앞이 보이는 것도 신기하다.
"니가 자른 거 아니지? 세진이 형이 손봐 주셨지?"
"놔……나 쪽팔린단 말야 애들 다 보잖아……놔……."
"정국이가 돈 냈어?"
"아니 형이 꽁짜로 해줬어……."
죽어가는 목소리로도 꼬박꼬박 대답한 김태형은 화장실 가겠다며 어기적어기적 사라졌다. 박지민은 김태형의 등 뒤에 대고 조막만한 손을 흔들며 호섭이 같다! 귀엽네! 라고 열성적인 반응을 보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오늘 이 궁금증을 해갈하지 못하면 나는 고대로 말라죽고 말 것이다. 나는 김태형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박지민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어어 정국아 어디 가? 짐짝처럼 질질 끌려오던 박지민이 어리둥절해서 외쳤다. 우리는 발길 닿는 대로 별관 뒤쪽의 화단으로 내려갔다. 양아치들의 담타 전용장소.
"솔직히 말해봐."
"뭘?"
"김태형 뭐 있지."
"우리 태태한테 있는 건 돈이랑 얼굴밖에 없어."
"아니 장난하지 말고."
"너 접때도 비슷한 거 물어보지 않았나? 김태형한테 직접 물어보라니까?"
"걘 내 말에 대답 안 해준다고!"
깜짝이야. 놀란 토끼 눈이 된 박지민이 바닥의 가래침을 밟을세라 황급히 자세를 바꾸었다. 여차하면 신발 밑창에 찐득한 가래와 담뱃진 덩어리가 달라붙기 십상이었다. 나는 까치발로 능숙하게 화단 위에 올라섰다. 박지민은 통통한 입술을 부리처럼 비죽 내밀고 중얼거렸다.
"태형이가 좀 사차원이긴 한데 그렇게까지 이상해 보이나."
"걔 담배 피워."
"담배 피우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김태형 호빠 같은 데 다니지?"
"미쳤니?"
"나 걔 저번 주 금요일에 힐즈에서 만났어."
"……?"
"첨 봤을 때 김태형 아닌 줄 알았어. 막 가죽재킷 입고, 딱 붙는 바지에 워커 신고, 담배 냄새 졸라 풍기고, 머리도 막 이래 가지고,"
"아……."
"걔 막 누나들 꼬셔서 세 명씩 돌려 사귀구 그래?"
"아니야."
걔 그런 짓 안 해. 그제야 웃음기를 거둔 박지민이 뒷머리를 문질렀다. 난감한 표정으로 입술을 앙 다물며 고민하는 티가 역력했다. 차마 김태형을 대동하고 힐즈에 나타났던 사람이 닷새 전에 헤어진 구 썸녀라는 사실은 말하지 못하고, 나는 조바심 내며 박지민이 실토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걔 사복 취향이 쫌 노티 나서 그런 거야……."
코웃음이 나왔다.
"개소리 하네. 펄럭바지로 바닥 다 쓸고 다니는 걸 내가 엊그저께 봤는데? 부엌가위로 티셔츠 목 자르는 걸 내가 다 봤는데?"
"……."
"누나누나 거리면서 전화하는 것도 다 봤는데?"
난처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박지민이 한숨을 푹 쉰다.
"태형이 알바 하는 거야."
"알바?"
"뭐래야 되지……애인대행? 그런 거 비슷하게 하는 거야. 진짜 건너건너건너서 가끔씩 연락 오는데 그러면 가서 애인인 척 해주고 오는 거야. 옷도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입고, 걔 얼굴 잘생겼으니까 그냥 가서 옆에 앉아가지구 좀 웃기만 해줘도 돈이 된대."
뭐라고?
"그런 알바가 있다고? 난 처음 듣는데?"
"아는 게 이상한 거지."
"걘 그런 걸 왜 하는데?"
"작년에 태형이가 급전이 엄청 필요했던 적이 있었어. 그 때 아는 형이 추천해 줬다가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거야. 그런 대행 해주는 사람들 전용 카페가 있대. 얼굴이랑 나이 다 까야 되고, 몇 살 이하는 안 되고, 한 달에 몇 명 이상은 안 되고……."
"……."
"태형이 인기 되게 많아. 자기가 지역이랑 나이랑 돈 다 따져서 가려받는 거야. 얼굴 너무 팔리면 안 되니까."
"……어째 별로 좋게는 안 들린다."
"태형이 얘긴데 내가 너무 자세하게 말하긴 좀 그렇고. 궁금하면 니가 더 물어봐."
"걔네 부모님은 그런 거 아셔? 뭐라고 안 해?"
"걔 어차피 혼자 살잖아. 당연히 말 안 했지."
"엉?"
"부모님이 동탄에서 엄청 큰 보쌈집 하셔. 지금 사는 집도 학교 때문에 졸업할 때까지만 혼자 쓰는 거야."
박지민은 그것도 몰랐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나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구시렁거린다.
"친해진 줄 알았더니 무슨 아직도 내외를 해……."
할 말이 없었다. 상황파악 중인 나를 훑어본 박지민은 할 일을 끝마쳤다는 듯 어깨를 쭉 폈다. 김태형의 결백을 대신 증명해 주듯이.
"자세한 건 태형이한테 물어봐라! 난 이제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너 김태형 사복 노티 난다구 깠던 거 다 이른다."
"에에이……정국아……."
솜주먹을 쥐어 내 팔을 콩콩 두드리며 박지민이 야살스럽게 눈웃음을 쳤다. 어딜 애교를 부려. 나는 냉정하게 팔을 치웠다.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이 있다. 박지민 얘도 아닌 척하지만 사실 김태형이랑 같이 그런 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세상 순진한 얼굴로 도록도록 나를 쳐다보는 박지민의 얼굴을 마주하니 캐물을 의욕이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그럼 그 때 힐즈에서 누나와 같이 있던 것도 그놈의 애인대행이었단 소린가. 내막을 알게 되었는데도 화가 나기는커녕 어쩐지 기운이 쪼옥 빠진다.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대체 내가 뭐라고.
제시간에 칼같이 하교한 내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신발장에 낯선 스니커즈 한 쌍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거실에서는 텔레비전이 아니라 노트북으로 재생한 것이 분명한 오디오 사운드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신발을 벗으며 멀뚱멀뚱 그 낯선 스니커즈를 내려다보았다. 특이한 거 신네. 퓨마 리미티드에디션 같은데 못 보던 색깔이다. 핑크. 색깔만 보고 여자인가 했는데 여자 신발치곤 사이즈가 너무 컸다. 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남준이 형이 거실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어, 왔냐?"
"집에 누구 있어?"
"친구 잠깐 데려왔어. 곧 나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뭘 하는지 거실에서 고개만 내밀고 말한 형은 다시 머리를 쑥 집어넣어 버렸다. 나는 가방을 침대에 내던지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교복을 벗고 팬티 차림으로 행거를 뒤졌는데 내가 입으려던 검정색 무지 티셔츠가 보이지 않았다. 목둘레가 넓어서 홈웨어로 쓰려고 빨아둔 거였는데. 나는 팬티만 입은 채 남준이 형을 부르며 밖으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거실 협탁 앞에 앉아서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둔 형이 내 검정 무지 티셔츠를 태연스레 입고 있는 것이다.
"형 왜 내 옷 말도 안 하고 입어?"
"너 이 옷 밖에서 안 입잖아."
"잠옷으로 입으려고 빨아뒀단 말야!"
"야 넌 맨날 내 옷 훔쳐 입으면서 잠옷 티셔츠 하나 빌려입은 거 가지고 난리냐?"
"형도 옷 많잖아!"
이상하게도 남준이 형 앞에만 서면 찡찡거리는 말투가 나온다. 우리 친형한테도 이렇게 땡깡은 안 부렸는데. 형은 그래서 어쩌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에이씨. 괜히 분이 안 풀린 나는 성큼성큼 화장실 쪽으로 이동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형 팬티 내가 다 뺏어입을 거야! 엉덩이랑 앞쪽에 하나씩 존나 큰 빵꾸 낼 거야!"
"야 화장실 문 열지 마! 안에 사람 있어!"
얼굴도 안 보이는 형의 다급한 목소리가 외쳤다. 이윽고 어딘가에 쿵, 무언가 둔중한 것이 부딪치고 악, 하는 형의 비명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우당탕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이어졌다. 대충 유추하건대 소파에서 황급히 일어나려다가 협탁에 무릎을 박았고 그 바람에 허벅지에 올려둔 노트북마저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상황이겠지. 나는 혀를 차며 화장실 문 손잡이를 돌렸다. 잠기지 않은 문이 매끄럽게 열렸다. 그리고 반쯤 열린 문틈으로 안에 있는 누군가를 확인한 순간, 나는 얼굴의 피가 순식간에 목 아래로 싹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문을 닫았다. 쾅 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짝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뒤이어 화장실 앞으로 후다닥 쫓아나온 남준이 형은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다. 아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야, 안에 사람 있는데……팬티 바람으로……말 좀 듣고 열지 그랬냐."
"형 저 사람이랑 어떻게 알아?"
"어?"
"저 사람이랑,"
내가 말을 더 이을 틈도 없었다. 부서뜨릴 듯 닫았던 화장실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핑크색 후드에 청바지를 꿰어 입은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헐렁한 후드티 아래로도 빌어먹게 넓은 어깨와 말끔반지르르한 얼굴이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팬티 하나만 달랑 입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국이?"
시발 요즘 내 일진 대체 왜 이러지? 빛의 속도로 남준이 형의 등 뒤에 몸을 숨기며 나는 생각했다. 부활할 가능성만 있다면 당장 혀라도 콱 깨물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