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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

연애의 왕 3

3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배운 중요한 사실이 있다. 게이들의 세계에서 외모가 뛰어나다는 것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략이자 어마어마한 무기라면 모를까. 잘생긴 게 금값이었고 몸까지 좋으면 금상첨화였다. 물론 세상 모든 게이가 다 그렇다는 무식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으나, 현실이 그런 것을 어떡하라고. 주위 사람들의 얼굴을 무의식 중에 뜯어보는 치졸한 짓을 시작한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역시 모든 근원은 내 다섯 번째 애인이다. 그 형은 남자는 물론 여자들도 끊임없이 구애할 만큼 잘생겼고, 나는 그의 옆자리를 꿰차기에 마땅한 외적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그래서 연애 초기에는 정말 용돈을 물 쓰듯이 썼다. 방학이 되면 매일 저녁 아파트 단지의 헬스장에서 죽치고 살았다. 솔직히 내 나이 때 이 정도 복근을 갖추려면 진짜 개고생 해야 한다.



'넌 안 그래도 귀엽고 잘생겼는데.'



박지민은 다섯 번째 애인과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을 물색하는 내게 간지러운 소리를 했다. 생전 처음 맛본 실연의 고통으로 약간 돌아버린 나를 달래기 위함이었다. 진정 좀 하라고. 솔직히 너도 얼굴 값 하는 거 맞잖아. 너 재수없어. 내가 널 귀엽게 봐줘서 이만 하는 거지. 나를 만난 이래 가장 아픈 가시가 박혀 있었던 박지민의 돌직구를 기억한다. 양심상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나 그 형만큼은 꽤 좋아했다고 생각하는데. 연애도 나름 재미있었구.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다섯 번째 애인이 여자인 줄만 아는 박지민 앞에서 커밍아웃은 아직 무서웠다. 


그런데 왜 박지민은 다 안다는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박지민을 내심 무서워하는 까닭도 다 그래서 그런 거다. 말 안 하고 입 꾹 다물어도 쟤는 내 속마음을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 내려다보듯 다 읽어낼 것만 같다. 하지만 박지민은 구태여 나를 말리지 않았다. 몸조심하라고 말은 했지만 그만두라는 소리는 한 적이 없다. 아주 가끔씩 지금 사귀는 사람은 있냐고, 이번엔 또 누구냐고 지나가듯 물어보기는 했어도.


그래서 김태형에게 내가 그렇게 쇼크를 받았던 모양이다. 나는 잘생긴 비주얼에 정말 많이, 생각보다 더 많이 약하다. 그리고 김태형은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가장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던 녀석이었다. 그랬던 녀석이. 피씨방에서 본 김태형은 카메라 마사지만 몇 번 받아주면 웬만한 아이돌은 발바닥으로 싸대기도 후려갈기게 생겼다. 진짜로 용 됐다. 머리 넘기고 그 괴상한 안경 벗고 옷만 좀 갈아입었을 뿐인데 말이다. 장사 밑천을 들먹이고, 누나를 부르며 구석진 데서 몰래 전화를 하던 모습이 슬슬 아귀를 맞추는 것 같았다. 얘 뭔가 있다.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은 역시 박지민 뿐이다. 걔는 김태형과 둘이서 세계정복을 위해 작당모의하고 있대도 믿어질 놈이다.



"김태형 말야."

"응."

"쫌……의외더라. 저번에 보니까."

"태형이 잘생겼지."



틱. 내 손가락을 꼿꼿하게 세워놓고 매콤한 맛 꼬깔콘을 하나씩 끼워올리는 데 열중하는 박지민. 이미 오른손 엄지를 제외한 네 개의 손가락에 꼬깔콘이 여섯 개씩 끼워져 있었다. 정국아 가만있어. 가만히…… 눈에 한껏 힘을 주고 중얼거린 박지민이 또 하나의 과자를 집어 내 중지에 씌웠다. 나는 말릴 의지를 잃고 박지민의 손이 덜덜 떨며 내 손가락에 과자탑을 세우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앞에서 마주보는 표정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가문의 철천지원수를 십 년의 추격 끝에 드디어 눈앞에서 조우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실상은 옆에서 쿡 찌르면 금세 둥글둥글 풀어져서 왜? 하고 물어볼 성격임을 다 알지만, 나는 짠내를 풍기며 아가리를 활짝 벌리고 있는 꼬깔콘 봉지를 곁눈질하다가 물었다.



"김태형 걔 뭐 하냐?"

"뭘 해."

"아니 자꾸 장사한다 어쩌구 그러니까……궁금해서 그러지……."



나는 넌지시 말끝을 흐렸다. 아, 나 이런 거 진짜 소질 없는데. 뭣 좀 얻어내려고 모르는 척 빙빙 말 돌리는 거. 박지민은 여전히 사나운 눈으로 내 가운뎃손가락을 노려보며 되물었다.



"궁금하면 태형이한테 직접 물어보지?"

"나 걔랑 안 친하잖아."



틱. 수전증 환자처럼 떨리던 박지민의 손끝이 기어이 네 번째 손가락의 꼬깔콘 탑을 건드렸다. 과자들이 툭툭 책상으로 떨어진다. 냉큼 몇 개를 주워먹고 있는데 박지민은 김이 빠졌는지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푹 기댔다. 그리고 짭짤해진 손가락을 깨물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왔다, 속을 다 꿰뚫어보는 박지민의 투시안.



"정국아……너 태형이랑 내외해?"

"아니 그건 아닌데,"

"친해지고 싶다구 그냥 얘기해. 내가 그러라구 니네 소개시켜 준 게 언젠데 아직까지 이러구 있냐."

"내가 언제?"

"엄청 티 나……."

"아니거든."  



친해지고 싶다기보다 그냥 궁금한 거라고! 우연히 보게 된 얼굴이 너무 내 식이라서! 존나 잘생겨서! 아무리 니가 나랑 친하고 내 싹수 노란 것까지 다 알고 있어도 김태형이 너무 내 스타일이라서 꼬시고 싶어졌다고 얘기할 순 없잖아? 속으로 아우성치는 나를 측은하다는 듯 바라보던 박지민이 입을 열었다.



"태형이 불러줘?"

"아니."

"걔 아무한테나 치대는 거 잘해. 야 태태!" 



정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교실 뒷문을 열고 슬렁슬렁 걸어들어오던 김태형이 고개를 돌렸다. 또 그 놈의 범생이 은테안경에, 이번에는 퓨마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얼굴 드러내길 극도로 꺼려하는 연예인 쌩얼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아무리 봐도 그 피씨방의 김태형과 너무 괴리가 커서 자꾸 인지부조화가 일어나려고 한다. 그보다도 박지민이 대뜸 김태형을 불러재껴서 나만 난처해졌다. 재빨리 박지민의 통통한 주둥이를 틀어막았지만 이미 김태형은 이 쪽으로 긴 다리를 휘적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금세 박지민의 옆으로 온 김태형이 우리를 번갈아 보며 왜? 하고 물었다. 몰랐는데, 정말 몰랐는데, 얘한테서 시원하고 청량한 냄새가 난다.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섬유유연제 냄새다.



"나 불렀잖아. 왜."

"정국이가 너랑 친해지고 싶대."



시발 박지민…… 나는 차마 아니라고 외치지도 못하고 박지민의 팔뚝을 주먹으로 갈겼다. 김태형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꼬깔콘 봉지에서 한 움큼을 가져가 우적우적 씹었다. 그 눈길에 푹푹 찔려 딱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쯤에야 시선이 떨어졌다.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돌린 김태형은 나를 앞에 앉혀 두고서 박지민과 둘이 궁시렁거렸다.



"나랑 친해지려면 퀘스트 깨야 돼? 왜케 어렵게 얘기한대."

"몰라 나도. 수줍은가 봐. 정국이 수줍음 많이 타잖아. 니가 잘해주라."

"나 사람 잘 대해. 친한 척 잘해. 정국아 우리 이제 친한 친구 할까? 친해지려면 뭐부터 해야 되지? 다음 시간 체육인데 배드민턴이나 같이 칠까?"



그러면서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손가락을 쪼옥 빤다. 보란 듯이.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김태형의 까무잡잡하고 긴 손가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정확히 십 분이 지난 뒤의 체육시간. 무르익은 봄볕이 그늘 하나 없는 운동장을 쨍하게 내리비추는 가운데 우리 반 애들은 체육선생의 지시에 따라 짝을 지어 배드민턴을 친다. 식중독을 가까스로 극복한 체육선생의 낯빛이 몹시 창백했다. 반면 날이 갈수록 올라가는 기온 때문에 내 뺨은 벌써 반쯤 빨갛게 익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목덜미가 따갑다. 눈살을 양껏 찌푸리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돌아보자 생각보다 더 가까이에서 흔들리는 갈색 머리카락 때문에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섬유유연제의 향기는 어디 가고 대신 퀴퀴한 체육복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심각하게 눈을 찡그려 뜬 김태형이 내 어깨를 굳건히 붙잡고 서 있었다. 왜 저런 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체육 시간에조차 꿋꿋이 고수하는 은테 안경 때문에 한숨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저 안경만 어떻게 부러져도 내가 너 그렇게까지 구질구질하게는 안 봤을 거다.



"너 약속했지? 나랑 짝 하기로."



나는 그러겠다고 승낙한 적이 분명 없었던 것 같은데. 김태형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씩씩하게 내 손목을 덥석 붙잡고 운동장 가생이로 끌고 갔다. 아귀 힘이 셌다. 평소에는 팔락팔락 물 먹은 종이인형처럼 늘어져 있는 주제에. 손도 굉장히 컸다. 나보다 약간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쭉쭉 뻗은 긴 손가락이 내 손목에 감겨 있는 모습을 보자 어쩐지 귀가 따끈해졌다. 그래서 뿌리치지도 못했다. 날이 더워서 그런 거겠지.


체육 선생의 눈치를 보더니 체육복 윗도리를 훌렁 벗어제낀 김태형은 까만색 티셔츠 차림으로 변신했다. 배드민턴 채 두 개를 들고 와서 내게 하나를 들려주었다. 자기 것은 파란색이고 내 것은 빨간색이었다. 셔틀콕은 형광노랑색. 친해지려면 배드민턴을 같이 쳐야 한다는 건 어느 나라의 누구 머리에서 나온 이론일까,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태형이 배드민턴 채를 휘둘러 내 시선을 집중시켰다.



"정국아 운동 좋아해?"

"어."



나는 운동을 정말 좋아한다. 땀 흘리는 것도 좋고 실컷 고생하고 난 뒤의 노곤한 피로도 좋고 심지어 욱신거리는 근육통까지 반가워했다. 몸이 힘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완수한 것처럼 마음이 뿌듯했다. 김태형은 내 대답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야 잘됐다. 난 함부로 움직여서 땀 흘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



뭐래.



"너 운동 좋아하니까 니가 서브랑 줍는 거 다 하면 되겠다. 그럼 운동 많이 되잖아 그치?"

"……."

"나 여기 꼼짝 않고 있을게! 니가 나한테 정확하게 쳐봐. 그래야 수행평가 점수 잘 받을 거 아냐!"



이런 게 빙썅인가? 말로만 듣던 빙그레 썅놈?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는 나를 향해 김태형이 혀로 짤깍,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안경 너머로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뒷구르기를 세 번 하고 물구나무를 서면서 보아도 분명히 윙크였다. 그것도 엄마 뱃속에서부터 배우고 태어난 듯이 능숙한. 순간 피씨방에서 보았던, 깔끔한 양아치 같은 김태형의 출중한 얼굴이 오버랩되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역시, 내 눈이 정확하다. 얘 뭔가 있어. 존나 난놈이야. 난놈은 난놈을 알아보는 법이고, 김태형은 그 순간부로 내게 별종 이상의 동류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김태형은 남아일언중천금을 온몸으로 실천하겠다는 듯 진짜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나만 땀을 뻘뻘 흘리며 좆 빠지게 뛰어다녔다. 진짜로 나 혼자서 서브를 넣고 공이 빗나가도 내가 주우러 뛰어가고 나 혼자 김태형이 잘 받아칠 수 있게 방향까지 바꿔가며 별 짓을 다 했다. 김태형은 잘 하지도 않았지만 특별히 못 하지도 않았다. 몇 번 빗나가다가도 합이 잘 맞아서 오랫동안 핑퐁을 주고받으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무리 내가 운동을 좋아한다지만 이건 셔틀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땀이 목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겨드랑이까지 굴러 떨어지는 느낌에 소름이 돋는다.



"으아 힘들다."



오십 번째 서브를 넣고 주고받기가 실패했을 때, 내내 제자리에서 팔만 열심히 움직이던 김태형이 모래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저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땀범벅이 된 나는 씨근거리며 김태형에게 다가갔다. 대체 뭘 했다고 힘들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지. 손등에서 여물어 가는 물집이 땀 때문에 따끔거려서 몹시 불편했다. 남준이 형이 만두를 굽다 내게 선사한 물집은 새끼손가락의 손톱 크기만큼 착실하게 부풀어 가고 있었다. 나는 김태형의 옆에 내 배드민턴 라켓을 내던졌다.



"담배 피워서 호흡 딸리냐?"

"야 그거 비밀로 한다며."



무료한 얼굴로 운동장 가운데에서 종횡무진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던 김태형이 갑자기 말을 뚝 잘랐다. 대번에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몹시 서늘했다. 저렇게 정색할 줄도 알았구나. 박지민 불알친구 아니랄까 봐, 표정이, 똑같이 사람을 쫄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아, 비밀, 그랬지이. 소각장 뒤편에서 스쳐가는 말처럼 주고받았던 약속을 상기했다. 젓가락도 안 쓰고 담대하게 굴더니 민감한 사항이긴 했던 모양이다. 입을 꾹 다무는 나를 한참 올려다보던 김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모래먼지가 뽀얗게 흩날렸다.



"비밀이다. 알았지?"

"응."

"그래. 아이 착하다."



할 말이 없다. 김태형은 언제 정색했냐는 듯 벙긋 웃으며 내 젖은 머리를 헝클었다. 치열도 김태형의 이목구비를 닮아서 굉장히 고르고 잘생겼다. 게다가 입가가 네모 모양으로 벌어진다. 특이하다. 이모티콘 같다. 땀투성이라서 더러울 텐데, 내가 머리를 약간 옆으로 젖히며 피해도 김태형의 큰 손은 끈질기게 나를 쫓아왔다. 기어이 내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고 떨어진다. 


교실로 돌아오자마자 습관적으로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또 연락이 쌓여 있었다. 이 남자는 꼭 이런 식이다. 내가 학교에서 폰을 제출하기 때문에 못 연락한다고 좋은 말로 달래놨더니, 수업을 듣는 시간에 아예 무더기로 카톡을 보내고 가끔씩은 받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 전화도 건다. 내 기준으로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짓이었다. 그렇게 내가 보고 싶어서 말라죽을 것 같나. 내 어디가 그토록 마성의 매력을 지닌 건지, 물론 내가 매력이 있다는 건 나 스스로도 자부하고 있지만, 여하튼 가끔 보면 정말 미친 사람 같았다. 오늘도 매한가지다. 점심 맛있게 먹었냐는 인사 다음으로 온 카톡이 교복 입고 교실에서 셀카 한 장만 찍어줄 수 없냐는 징글맞은 요구였다. 줄줄이 딸려오는 메시지를 다 읽지도 않고 씹어버렸다. 노잼인간.


김태형이 때마침 박지민과 함께 교실로 들어온다. 입에 쭈쭈바를 하나씩 물고 있었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김태형은 내 자리로 다가와 까만 봉다리에서 소다맛 쭈쭈바를 꺼냈다. 오늘 고생했으니까 선물. 그러고는 고맙다는 인사도 듣지 않고 박지민의 자리로 가버렸다. 


나는 차가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쭈쭈바를 책상에 내리쳤다. 봉지가 뻥 소리를 내며 터졌다. 꼭다리를 입에 문 채 창가 쪽에 있는 박지민의 자리 옆에 서 있는 김태형을 몰래 훔쳐보았다.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 때문에 그림자가 져서 김태형의 우뚝한 콧날이 한층 선명했다. 긴 속눈썹도 더 두드러져 보였다. 잘생겼다. 길거리 어딜 가도, 백날 채팅어플을 뒤져봐도 찾기 힘든 얼굴이다. 


휴대폰 액정을 켰다. 남자의 카톡 프사를 눌러 확대시켰다. 미모의 상대성 이론에 충실하여, 순식간에 웬 심해 오징어 한 마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으. 짜증이 울컥 치밀어 재빨리 사진창을 닫고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형 우리 그냥 헤어져요]

[미안해요]


미안하기는 개뿔. 나 원래 손가락으로는 거짓말 잘 한다. 마음에도 없는 사과로 딱 두 마디의 이별선언을 끝낸 뒤 곧바로 남자를 차단시켰다. 그리고 휴대폰 전원을 아예 꺼 버렸다. 다가올 후폭풍을 막으려면 지금은 그것이 최선이었다.






  점심시간에도 김태형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부른 게 아니라, 얘가 식판을 들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군만두가 쌓이다 못해 반찬용 세 칸을 전부 차지한 식판이 놓이고, 그 괴이한 식판의 주인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몹시 당황했다. 그래서 필터링도 없이 이렇게 외치고 말았다.



"뭐야?"

"친해지자며."



친해지자는 말 한 마디―심지어 내 입으로 말한 것도 아니고 박지민의 날조였다―가 이렇게 사람을 바꿀 수도 있구나. 나는 당황해서 멋대로 튀어나간 말을 주워담지도 못하고 주억였다. 친해지려면 밥도 같이 먹어야지. 김태형은 내 옆의 의자를 북 소리나게 끌어당겼다. 박지민도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원래는 박지민이 나와 밥을 먹고, 친구가 많은 김태형은 우리 반의 다른 애들 아니면 다른 반 친구들과 함께 여럿이 모여서 떠들며 밥을 먹던 것이 일상이었다. 급식실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면 대부분은 김태형 무리였다. 히키코모리 같은 차림새로 신기하게도 인맥이 넓었다.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한 관문은 김태형에게 지하 20층 높이쯤 되는 모양이었다. 



"사과 먹을래?"



후식으로 나온 빨간 사과 한 알을 김태형이 내밀었다. 사과 좋지. 봉지에 든 사과를 망설임 없이 받았다. 받고 나서야 약간 민망해졌다. 생각해 보니 요 며칠 동안 나는 얘가 주는 것을 받아먹기만 했었다.



"넌 왜 안 먹어?"

"나는 체중관리 해야 돼서."



아이돌이나 할 법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다. 그래놓고 식판에는 다 못 먹은 군만두가 어지러이 쌓여 있었다. 일반인의 상식으로 얘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사과만 내게 주고 식판을 쓸어가다시피 먹어치운 김태형은 태연하게 빈 식판을 반납했다. 나는 김태형이 준 사과를 교실로 가져와 가방에 넣었다.


정신없이 하루치 수업이 끝났다. 박지민은 어울리지도 않게 이번 학기 야자를 신청해서 학교에 남아 있어야 했다. 김태형은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종이 치자마자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꼼짝없이 학원행이었다. 학원가는 학교에서 충분히 걸어갈 만한 거리에 있었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는데 아까 점심 때 김태형에게 받았던 사과봉지가 나왔다. 학원에서 간식으로 먹을까. 사과를 꺼내 한 손에 들고 가방을 추켜올리며 교문으로 내려갔다. 교문에 거의 도착했을 때, 전방 십 미터쯤 앞에 몹시도 낯익은 차 한 대가 보였다. 시커먼 투스카니. 언덕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나는 그 차종을 확인하자마자 즉시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씨발. 황급히 걸음을 뒤로 물렸다. 예상하던 후폭풍이 닥쳤다. 그것도 학교 앞에. 좆됐다.



"전정국!"



내 이름 그렇게 크게 소리쳐 부르지 말라고! 나는 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내 울렁이는 속을 알 리 없는 저, 눈새 같은 남자가 투스카니에서 내려 이 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다. 앞머리까지 까올리고 아주 위풍당당했다. 그래도 김태형보다 스무 배는 못생겼다. 아오 씨발. 궁지에 몰린 나는 도망갈 곳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나보다 키가 크고, 다리도 그다지 짧지 않은 남자는 순식간에 내 코 앞까지 당도했다. 하필이면 사과를 쥐고 있는 손목이 덥석 붙들렸다. 나는 벌레가 닿은 듯 소스라치며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학교 앞에서 이러다가 이상한 소문 퍼지면 나 혀 깨물고 자살할 거다. 진심이다.



"왜 왔어요."

"니가 그딴 소릴 하는데 내가 안 오게 생겼어? 얘기 좀 하자. 타."



이 또라이 새끼. 나는 미친 듯이 눈을 굴리며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쓸데없이 삐까번쩍한 차가 고등학교 정문 앞에 떡하니 서 있고 거기다 다 큰 남자 둘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니, 우리 학교 애들이 전부 다 한 번씩은 이 쪽을 돌아보며 지나간다. 당장 손에 든 사과로 이 남자의 머리통을 내리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사과 따위로 후려갈기면 죽지는 않을 텐데. 나는 일단 안간힘을 써서 내 손목에 달라붙은 남자의 손가락을 하나씩 잡아뗐다. 억지로 떼어놨더니 내 반대쪽 손목을 꽉 쥐고 사납게 끌어당긴다. 환장하겠다. 이러다 선생이라도 나타나면 정말 다 끝장이었다.



"나 형이랑 할 말 없어요."

"어 나는 할 말 많어. 빨리 타. 사람 빡치게 하지 말고."

"학교 앞엔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니가 이딴 식으로 굴지만 않았어도 내가 여기까지는 안 왔지."



실랑이가 길어질수록 좆되는 것은 내 쪽이다. 하지만 저 차의 뒷좌석에 타는 순간 나는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만다. 나는 나를 질질 끌고 가려는 남자의 힘에 뻗대기 위해 두 발을 바닥에 바짝 붙였다. 내가 예상 밖으로 용을 쓰자 남자의 이마에는 이제 분노의 힘줄이 조금씩 돋아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남자는 나를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씨발 진짜 죽고 싶냐? 좋은 말로 할 때 안 타?"

"어 안 타."



낮은 목소리가 내 어깨 너머에서 대신 대답한다.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남자의 성난 눈썹이 약간 아래로 내려갔다. 등골부터 엉덩이까지 소름 한 줄기가 쭉 내달렸다. 김태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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