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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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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 수업 중이라 드물게 사람이 하나도 없는 매점 앞에서 김태형이 지갑을 열었다. 우리의 물주. 아무 생각 없이 곁눈질했다가 나는 속으로 좀 놀라고 말았다. 웬 구찌. 손바닥만한 지갑을 가득 채운 지폐들 중 만 원 한 장을 꺼낸 김태형이 난감한 표정으로 매점 아주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줌마 저 천 원짜리가 없는데요. 엄마가 가끔 보는 드라마에서 재수탱이 재벌가 도련님 캐릭터가 서민들의 일상을 굽어살필 때에나 나오는 대사였다. 하지만 김태형은 재벌 3세는 아니었고, 그래서 이상한 방식으로 통이 컸다. 우리를 삐까번쩍한 고급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지는 않았지만 대신 만 원짜리를 다 채울 수 있을 만큼 먹을 것을 사재끼라고 했다. 아무거나 사, 너네 먹고 싶은 거. 말투만 들으면 매점을 통째로 사다주기라도 할 것처럼 의연했다. 


박지민은 아무 동요 없이 시키는 대로 먹을 것을 골랐다. 이런 게 너무 익숙해서 놀리고 싶은 마음도 없는 눈치였다. 빵에 컵라면에 아이스크림과 초콜릿까지 하나씩 끼고 나온 우리는 마땅히 갈 데가 없어서 매점 옆 간이식당 테이블에 먹을 것을 쏟아 놓았다. 이 학교에 입학한 후 이렇게 정신나간 사람처럼 매점에서 뭘 사들인 것은 처음이었다. 



"아줌마가 너 이상하게 쳐다보더라."

"왜? 내가 매출 올려드렸는데."

"니가 오만 원짜리 내려고 설쳤잖아."

"얘가 잘 먹으니까."



김태형이 다짜고짜 나를 가리켰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김태형의 까만 구찌 반지갑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신사임당의 갈색 얼굴을. 돈 많다고 호기 부리던 게 순 구라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잔돈을 깨야 한다고 부득불 신사임당 한 장을 꺼내는 김태형을 한참 뜯어말렸던 박지민은 그래 너 좆대로 하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쭈쭈바를 쪽쪽 빠느라 볼이 홀쭉해진 나는 김태형과 박지민의 왈가왈부를 구경하느라 눈만 굴렸다. 박지민은 김태형의 갈비뼈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내게 역성을 들어달라고 보챘다.



"정국아 이 새끼 재수없지. 돈지랄 하는 거."

"애기한테 그러지 마. 나 이상하게 보잖아."



그런 말 안 해도 이미 충분히 이상한데. 나는 신경질적으로 다 빨아먹은 쭈쭈바 꼭다리를 뱉어냈다.



"애기라고 부르지 마."

"그럼 뭐라 불러?"

"내 이름 있잖아."

"우리 안 친한데 이름을 막 불러? 넌 그럴 수 있어? 안 친한데 막 나보고 태형아, 태태야, 그럴 수 있어?"

"아니 그거는,"

"애기 싫으면 아재라고 불러줄까?"

"그게 더 싫어!"

"그럼 그냥 애기라고 할게."



존나 무논리…….



"내 얼굴이 돈줄이라서 흠집 나면 손해가 장난 아니거든. 너 진짜 고소할 뻔했다니까? 내 콧대 부러지면?"

"니가 그런 소리 해도 정국인 못 알아먹어."



박지민이 김태형의 헛소리를 한칼에 잘랐다. 무슨 장사인데 저래. 궁금했지만 우리 친한 사이 아니라고 쐐기를 박던 김태형의 말 때문에 무안해졌다. 김태형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또 엉뚱한 질문을 한다.



"뭐 더 먹고 싶어? 사줄까?"

"됐어."

"막 이런 눈으로 보길래."



그러면서 눈망울을 커다랗게 치뜨고 장화신은 고양이 표정을 짓는데, 아니 황당한 건 둘째치고 나는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거든요. 김태형은 큰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안경알 너머로 나를 뚫어져라 관찰하고, 부담스러움에 질린 나는 다 먹지도 못한 쭈쭈바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골인시켰다. 이렇든 저렇든 범상치 않은 또라이는 확실하다. 좀 더 일찍 알았어야 했나.






  "형 또 옷 샀어?"



  김태형의 눈살 때문에 다 먹지도 못한 과자며 빵은 가방에 넣어 집까지 고이 모셔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나는 집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한 명 빼고. 요란한 컬러감의 핑크색 컨버스가 한 짝이 뒤집힌 채 신발장에 나둥그러져 있었다. 노크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는 꽥 소리를 질렀다. 또 옷 샀어, 또!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고 있던 남준이 형이 화들짝 놀라며 책상 의자다리를 발로 걷어찼다. 



"아오 존나 깜짝이야."



발톱은 안 깨졌나 몰라. 나는 오른쪽 발가락을 부여잡고 고통스레 주저앉는 형에게서 매정히 시선을 돌렸다. 이 쇼핑성애자. 장학금을 전부 다 옷 사는 데 쏟아붓는 게 틀림없다. 침대 밑에는 짐승이 물어뜯은 듯 갈기갈기 찢어진 비닐봉투와 택배 박스, 뽁뽁이, 새 가죽 냄새가 풀풀 풍기는 워커와 옷가지가 쌓여 있었다. 대체 저 옷 봉투는, 질기기도 엄청 질기던데 저토록 산산조각이 나려면 얼마나 힘을 줘서 찢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바닥에 카펫처럼 널브러진 옷가지를 밟지 않기 위해 까치발로 입장하는 동안 고통의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형이 물었다.



"야 이거 어때."

"뭐가."

"괜찮냐고."



새 옷인지 구제인지 모를 희한한 색깔의 품 큰 티셔츠를 입고, 마찬가지로 헐렁한 일자 청바지를 입은 형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심지어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제 취향 개도 못 준다고 모자도 존나 특이한 걸 샀다. 아직 날이 더운데 왜 벌써부터 저런 수도승 같은 골무형 털모자를.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쁘지는 않은데,"

"않은데?"

"내 돈 주고는 안 사 입어."



영 상반되는 패션 취향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내가 단호하게 대꾸하자 형은 자신의 펑퍼짐한 바지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니가 패션을 아냐."

"모른다 왜! 아니 모르는 사람한테 왜 굳이 물어봐?"

"됐다 임마. 패션은 자기 만족이야."



아니 그러니까 나한테 왜 물어봤냐고. 답정너야? 나는 짜증스레 발끝에 닿는 후드며 티셔츠를 툭툭 걷어찼다. 화풀이하는 거 맞다. 오늘 내내 같이 있었던 놈이 생전 듣도보도 못한 또라이였으니까. 전정국 인생에서 남한테 휘둘리는 일이 전무후무했는데 김태형 얘는, 정말 별천지에서 왔나, 멀쩡한 사람의 사고도 자꾸 훼까닥 돌게 만든다. 야야, 그거 차지 마. 형이 재빨리 긴 다리를 뻗어 내 발길질을 저지했다.


남준이 형은 내 외사촌이다. 하나뿐인 외사촌, 은 아니고 형에게는 형과 꼭 닮았는데 조금 덜 둥글둥글하고 조금 더 귀엽게 생긴 여동생이 있다. 공부를 잘해서 중학교 때부터 집안 어른들의 기대와 주목을 한 몸에 받던 형은 모두의 예상대로 서울의 상위권 대학에 당당히 진학했다. 특출나게 똑똑한 친척이, 그것도 또래라면 허구한 날 비교당한다고 재수없어하는 친구들이 내 주위에도 몇 명 있었지만 형은 그런 캐릭터가 아니었다. 까놓고 말해서, 가끔 보면 저 형이 어떻게 저리 똑똑하고 뭐든 잘 외우고 이해하는지 신기할 때가 있다. 그 머리를 가지고 한 번도 잘난 체한 적이 없다는 것은 둘째치고, 형은 좀 허당 같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툭하면 뭘 자꾸 빠뜨리고 잊어버리고 아무데나 질질 흘리는데다, 심지어 힘이 좋아서 멀쩡하던 물건이 형 손아귀에서 아작이 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형의 범상치 않은 파괴력은 나도 아주 어릴 때부터 몸소 체득했다. 하도 많아서 지금은 기억도 다 안 나는데 딱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내가 어릴 적 부산에 살 때 형이 명절마다 가족들과 함께 큰집으로 내려오곤 했었다. 우리는 코찔찔이 시절부터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나는 새로 산 변신로봇을 남준이 형에게 자랑했고 형은 신기하다고 그것을 몇 번 만지작대다가 로봇의 팔 하나를 부숴버렸다. 두 동강 난 로봇의 팔을 쥐고 나는 온 집안이 떠나가라 울어제꼈다.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던 형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 눈이 퉁퉁 부은 내 호주머니에 자신이 받은 용돈을 몰래 찔러주었다. 자기 돈으로 더 멋있는 로봇을 사라고. 착한 형이었다. 가끔 저 힘 때문에 옆에 있던 내가 물건과 같이 파괴당할까 봐 무섭긴 하지만 아직 그런 불상사는 한 번도 없었으니.



"울 엄만 어디 갔어?"

"고모는 동창모임 있다고 나가셨는데. 알아서 저녁 챙겨먹으래."



일산이 고향인 형은 통학거리 때문에 내내 골머리를 썩히다가 이번 학기에도 기숙사 선발에서 처참히 탈락했다. 통학하기엔 멀고, 그렇다고 서울 대학가에 자취방을 구하자니 애매한 거리였다. 하다못해 방 값이라도 싸면 모를까. 마침 내 친형이 입대하는 바람에 우리 집 방 하나가 비었다. 그래서 남준이 형은 지금 우리 형의 방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공부 잘 하는 사촌형의 동거가 내 진학에 도움이 되리라고 부모님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사실 그런 순기능은 별로 크지 않다. 아 물론 수능특강의 모르는 문제나 학원 숙제를 물어볼 때에는 꽤 도움이 됐다. 특히 문학이랑 영어. 남준이 형 특유의 시대를 앞서나가는 패션관을 내가 배우지 않은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형은 요리를 못 해서 내 끼니를 챙겨줄 수도 없다. 형이 부엌에 서 있으면 그곳의 모든 물건이 흉기로 변질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부엌 입구에서 얼씬거리는 형을 몰아내고 냉동실을 뒤져 만두와 동그랑땡 봉지를 찾아냈다.



"반지 줄까?"

"웬 반지."

"몇 개 선물받았는데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고등학생이 반지 받아서 어따 쓴다고. 액세서리를 좋아하는 건 내 주위에서도 박지민뿐이었다. 걔 귀에는 벌써 피어싱 구멍이 몇 개 뽕뽕 뚫려 있다. 가끔 사복을 입을 때에나 귀에서 뭐가 짤랑거리는 것을 몇 번 보았다. 박지민은 반지도 좋아하고 팔찌도 좋아했다. 받아서 박지민에게 주면 좋아하려나. 걔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김태형 생각도 같이 떠오른다. 구찌 반지갑을 쓰고 매점에서 오만 원을 내는 돈지랄러 김태형.



"형 만두 좀 구워줘."

"엉."



못 미더운 눈치로 다가온 남준이 형이 프라이팬에 일단 기름부터 두른다. 나는 전자레인지에 돌려 대충 해동한 만두를 건넸다. 형이 대뜸 물었다.



"너 걔랑 아직도 연락해?"

"누구."

"걔, 내가 소개시켜 준 애. 내 후배."



아 그 누나. 남준이 형이 얼마 전에 과 후배라며 여자 한 분을 소개시켜 줬던 게 떠오른다. 얘 어때, 하면서 대뜸 사진 한 장을 카톡으로 보내오기에 수업 도중 책상 밑으로 몰래 확인했다. 얼굴은, 예뻤다. 눈도 크고 피부도 하얗고. 새침한 귀염상이었다. 형보다 어리다면 나랑 나이 차이는 두세 살 나겠지 싶었고 그 정도야 뭐, 얼굴이 일단 내 식이라 괜찮았다. 그래서 형에게 물었다. 예쁘네. 근데 왜? 형은 한 시간쯤 지나서야 늦은 답장을 보냈다. 걔가 너 맘에 든다고 소개시켜 달라더라. 어떡할래? 받을래 말래?


나야, 땡큐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예쁘고 내 스타일인 여자가 심지어 나를 마음에 들어해서 소개까지 시켜 달라구 그랬다는데, 거절할 멍청이가 어디 있나. 게다가 나는 연하보다는 동갑, 그리고 연상이 더 좋았다. 받을래. 번호 줘. 그렇게 우리는 연락을 시작했다. 벌써 두 번쯤 만났고 늦게까지 카톡을 주고받다가 전화도 몇 번인가 했다. 누나의 실물은 사진만큼이나 귀엽고 예쁘장했다. 이 사람이다, 라고 꽂히는 느낌은 없지만, 사실 그렇게 첫눈에 팍 꽂혔던 사람은 네 번째 여자친구의 오빠이자 나의 다섯 번째 애인이었던 그 남자밖에 없었지만, 아무튼.



"하지. 왜?"

"그냥. 확인 차."

"뭐야아."



형은 무슨 말을 하려다 삼키는지 허공에 손을 한 번 휘저었다. 나는 형의 옆얼굴을 보다가 싱겁다고 중얼거리며 냉장고를 다시 뒤졌다. 마른반찬이 든 통을 꺼낸다. 해동시킨 만두를 실험체 다루듯 이리저리 살피던 형이 서너 개를 기름이 끓고 있는 프라이팬에 던져 넣었다. 대번에 기름이 팍팍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튀어오른다.



"아 따거!"



팔에 기름이 튀었는지 움찔거리던 형이 가스레인지 옆에 층층이 포개져 있던 냄비를 건드렸다. 내가 다급히 손을 뻗었으나 이미 늦었다. 순식간에 싱크대 안의 구정물로 냄비탑이 풍덩풍덩 무너졌다. 형은 물에 잠긴 냄비들을 보며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형 그냥 방에 들어가."

"……미안."

"설거지나 해. 설거지만."



아무래도 형은 부엌에 발끝도 들이면 안 되는 거였어. 나는 인상을 아낌없이 구기며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큼직한 기름방울이 튀어 손등 한가운데가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조만간 물집이 잡힐 기세였다. 따가워. 아프다. 찬물을 틀고 손을 담그며 한숨을 푹 쉬었다.



 

 

*    *    *

 

 


 

  담배 피우는 김태형을 발견한 뒤 며칠이 지났다. 그럴싸하게 연기를 내뿜던 김태형의 내막이 궁금했지만 며칠을 보내니 물어볼 생각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담배 피우는 애가 내 주변에 김태형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무렵의 나는 아주 오랜만에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남준이 형이 소개시켜 준 누나와도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그러니까 나는 문자 그대로 짝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소리다. 남준이 형이 알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내 손모가지나 발목 중 하나가 분질러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번에 만나는 사람은 나보다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았다. 대학 복학생. 심심풀이로 아무 생각 없이 깔았던 채팅 어플에서 만났다. 여자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만난 적이 없었는데 그에 비해 괜찮은 남자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개중 가장 물 좋고 믿을 만한 어플이라고 했지만 내 눈에는 이상한 인간들이 태반이었다. 남자들만 모여 있어서 그런지 원초적인 게 도를 넘었고, 다들 거리낄 게 없는지 몹시 부담스러운 방식으로 매력을 어필했다. 매력이 똥 되는 게 순식간이라는 것을 왜 아무도 모르는지.


일곱 살 연상의 이 남자는 그나마 고르고 고른 상대들 중 내 기준에 가장 부합했다. 아랫도리나 복근짝부터 대뜸 까놓고 나오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얌전하고 비싸 보이는 니트 차림의 프로필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얼굴도 이만하면 괜찮고. 뽀샵을 좀 했나? 뭐 이 정도면 심하게 깎거나 키운 것 같지는 않다. 나도 그 정도는 해줘야 프로필이라고 내놓을 수 있으니까. 나는 최근에 찍은 사진들 중 가장 예쁘게 나온 셀카를 달아놓고 먼저 말을 걸었다. 풋풋한 고등학생이라는 메리트를 자랑하기 위해 일부러 교복까지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열여덟이요. 고2. 진짜예요. 프사 본인 맞는데, 학생증 까요? 이렇게 말하면 열에 열, 백에 백은 호의적인 답장이 온다. 솔직히 나도 남자지만 남자들 심리를 보고 있자면 참 고역스럽다. 그저 어리고 이쁜 것만 좋아해서, 덕분에 나 같은 애들은 재미를 보고 있지만, 아무튼 이 남자 역시 순순히 내 떡밥을 물었다. 비싼 시계를 차고 자기 이름 앞으로 된 차를 끌고 다니는, 나름대로 금수저다.


잘해 주고, 돈도 많고, 얼굴도 그만하면 봐줄 만하고, 비싼 선물 턱턱 안겨주는 것도 다 좋은데. 며칠 전부터 슬슬 섹스를 바라는 눈치라서 신경이 쓰였다. 키는 나보다 약간 더 큰데, 아무리 봐도 나를 기어코 깔아뭉개고야 말겠다는 표정을 너무 역력히 드러냈다. 괴로웠다. 그냥 며칠 굶어서 눈에 뵈는 게 없는 얼굴처럼 보이는데 제 딴에는 그게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남자에게 뒤를 뚫리다니. 무섭다고 적당히 빼는 것도, 입이나 핸드잡으로 퉁치고 넘어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아픈 것은 정말 싫었다. 그냥 형이 깔리면 안 돼요? 내가 잘해 줄게요, 라고 말한다면 개소리라고 그 자리에서 나를 넘어뜨릴지도 모른다.


한 가지 더 짜증나는 게 있는데 연락에 지나치게 목을 맨다는 것이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메시지나 전화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주기적으로 어디서 누구와 뭘 하는지 보고하지 않으면 득달같이 휴대폰을 울려댔다. 그나마 학교에서는 안 된다고 딱 잘라놔서 괜찮은데, 피씨방에서 한창 게임에 열을 올리고 있거나 집에 있을 때 불쑥 전화가 오면 솔직히 다 엎어버리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다.



"아 씨발 진짜 쫌."



징징 울려대다가 멈추고, 또 징징 울다가 멈추기를 수십 번, 드디어 인내심이 폭발한 내가 헤드셋을 벗으며 욕지거리를 와락 내뱉자 옆에 앉은 박지민이 힐끔 돌아본다.



"누구야?"

"그냥."

"전화 오는데?"



막대사탕을 물고 있던 박지민이 턱짓으로 뒤집어 놓은 내 핸드폰을 가리켰다. 아 진짜 헬스 할 시간에 그 놈의 쥐꼬리만한 참을성이나 좀 키우시던가. 근육 밸런스도 거지같은 게. 욕을 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49번 스톱이요. 알바 형에게 외치고 나가려다가 문득 김태형을 보았다. 피씨방 파티원을 소집한 주도자가 박지민이라서 같이 딸려온 참이었다. 박지민의 반대쪽 옆에 앉은 김태형은 담배 대신 츄파춥스 하나를 물고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흰 사탕막대를 보니 불현듯 그 때의 담배가 떠올랐다. 저렇게 보니 또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자꾸 생각나면 나만 불편한데.


나는 어기적거리며 복도로 나갔다. 정말 귀찮은 것만 생각하면 이 짓거리도 못해 먹겠다. 아니나 다를까, 좀 늦게 전화를 받았다고 불평이 와르르 쏟아졌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냐는 타박도 받고 밥 먹었냐는 안부 인사도 듣고 이틀 뒤 토요일에 뭐 할까, 뭐 먹을까, 어디 가고 싶냐는 시시한 질문에도 대충 대답해 주면서 언제쯤 슬슬 전화를 끊을지 재어 보는데 피씨방 문이 열렸다. 김태형이 나온다. 그 핑계 삼아 얼른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형형거리면서 애교나 부리는 모습을 김태형이 본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혀를 콱 깨물고 싶을 것이다.



"형 내가 쫌 있다 다시 전화할게요. 지금 바빠서."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는 것도 귀찮아서 대충 둘러댔다. 그러자 전화 받은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벌써 끊냐면서 또 구시렁거린다. 나이를 뒤로 처먹었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닌가보다. 무시하고 그냥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김태형은 계단 앞에 서 있는 나를 못 보았는지 헝클어진 뒷머리를 슥슥 매만지며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팔목에 얄찍한 종이가방 하나가 덜렁 걸려 있었다. 맨발이 시릴 것 같은데 굳건하게 쪼리나 슬리퍼만 고집하는 모습이 언제 봐도 참, 후줄근했다. 새삼 생각하지만 저렇게 낭비할 거라면 저 얼굴을 나한테나 넘겨줬으면 좋겠다. 물론 몸뚱이는 내가 더 근육질이고 탄탄하니까 빼고.


화장실로 사라진 김태형의 뒷모습을 한 번 더 살펴보고 다시 피씨방으로 들어갔다. 담배라도 피우려니 넘겨짚었다. 박지민은 쬐깐한 손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자판을 내리갈기면서 플레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저렇게 무식하게 퍼부으면 죽일 것도 못 죽이겠다. 똥손 박지민. 나는 혀를 쯧쯧 차며 자리에 앉았다. 쳐다보지도 않고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박지민이 물었다.



"헤어지쟤?"

"미친아 그런 거 아니거든?"

"너 그러다 총 맞는다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박지민은 내 사생활을 너무 잘 간파하고 있다. 총 아니고 돌이라고 했으면 그나마 현실적이라서 무서웠을 텐데. 무시하고 게임창을 다시 켰다. 얼마쯤 집중하고 있으려니 종아리와 뒤통수에 찬 기운이 훅 몰아닥쳤다. 뒤에서 피씨방 문이 열린 것 같았다. 찬 기운을 한 움큼 끌어안고 누군가 내 의자 뒤를 지나치더니 박지민 옆에 서서 말한다. 김태형의 목소리였다.



"야 나 간다."

"어 가냐."



박지민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구겨진 옆얼굴에 짜증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담배 피우고 왔을 줄 알았는데 냄새가 안 나네. 나는 슬쩍 곁눈질했다. 그리고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무릎이 늘어난 추리닝 바지에 목둘레를 이상하게 자른 티셔츠를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김태형 때문에. 아까 들고 가던 쇼핑백에 저런 게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김태형이 이마를 깐 것은 처음 보았다. 덥수룩하던 앞머리를 훌쩍 올려 맨들한 이마와 잘생긴 눈썹을 드러내고 볼캡을 썼다. 캐주얼한 점퍼. 핏이 예쁜 청바지. 신발도 예뻤다. 내가 갖고 싶어하던 뉴발란스의 새 모델이었다. 어디 데이트라도 가나. 이 정도면 환골탈태나 다름없었다. 이토록 정성스럽게 꾸민 김태형의 모습에 약간의 쇼크를 받은 나는 자연스레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길을 멈추었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박지민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아래 위로 김태형을 훑어보는 쭉 째진 눈이 무덤덤했다.



"너 오늘 상태가……."

"레벨 5."

"그래 보인다. 몇 살인데?"

"동갑."



아부지가 변호사래. 무미하게 대꾸한 김태형이 박지민의 의자 옆 바닥에 종이가방을 내려놓았다. 과하게 꾸미는 건 양아치 같다구 싫다더라.



"니 얼굴이 이미 범생이가 아닌데 무슨."

"그르게."



개구지게 씨익 웃던 김태형의 시선이 나를 잠깐 스쳤다. 멍청하게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는 내 얼굴이 얼마나 웃겼는지, 김태형의 긴 속눈썹이 눈꼬리를 따라 엷게 휘어졌다. 간다. 옷은 내일 학교에서 주라. 김태형은 손을 흔들고는 피씨방 입구로 나가 버렸다. 희미하게 맴도는 잔향을 뒤늦게 맡고 나는 뒤통수를 쿵 찧은 듯한 두 번째 충격에 휩싸였다. 김태형이 향수도 뿌린다. 겐조였다. 학교에서 맨날천날 구겨진 체육복 바지에 생활복 티셔츠만 입고 부스스한 머리로 잠이나 자던 김태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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