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뷔국
* 7-80년대 민주화 운동이 배경
* 2016 Festa 교복사진을 모티브로 참고
내가 무참히 쏟아지는 늦여름의 빗줄기를 뚫고 간신히 삼십여 분 늦게 병실에 도착했을 때, 정국은 들고 온 사과바구니를 보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퉁을 놓았다.
"맛있는 것 좀 사 오지."
내가 학생모를 벗고 비가 묻은 교복을 털고 있으니 한 번 더 큰 소리로 투덜댔다.
"야, 바닥에 물 떨어져."
새로 칠한 초록색 버스는 때깔만 고왔을 뿐 속은 낡을 대로 낡아서 약간만 비탈진 길이라도 심하게 털털거렸다. 속도는 더할 나위 없이 느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산중 깊숙이 처박힌 병원까지 찾아가 주는 버스는 그 한 대가 전부였다. 설상가상으로 가파른 오르막길 바닥이 온통 진흙탕이었다. 장마의 위력이었다. 마구 덜컹대는 버스에서 유리창에 옆머리를 두 번이나 처박아야 했다.
나는 기름때 낀 듯 미끌미끌한 바닥을 조심스레 밟으며 침대에 걸터앉아서 사과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책가방의 똑딱이 단추를 열어 거꾸로 뒤집었다. 만화책 다섯 권이 우르르 쏟아졌다.
"다 내가 보고 싶어했던 거네."
나는 그 이상의 칭찬이 더 이어지길 기다렸으나 정국은 어지러이 흩어진 만화책 대신 학생모를 벗어서 드러난 내 얼굴만 유심히 보고 있었다.
"이건 언제 그랬어? 형 이젠 막 쌈박질도 하구 다녀?"
그러면서 이마의 생채기와, 피가 불그스름하게 비치는 콧등의 반창고를 건드렸다. 찢어진 입술 끄트머리도 살살 매만졌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만화책 밑에 깔려 있는 누른 종이 한 장을 끄집어냈다. 보아하니 나를 기다리다 심심함을 못 견디고 낙서라도 하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단순한 선으로 이루어진, 교모와 교복 차림의 사내애 형상이었다.
"이건 누구야?"
"몰라."
"몰라?"
"그냥. 심심해서."
정국은 바구니에서 가장 알이 굵고 탐스러운 사과를 꺼내 환자복 소매로 문댔다. 흰 환자복. 움직일 때마다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얇은 천이었다. 나는 바구니와 가방을 나눠 쥐고 오느라 손금마다 땀이 찬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병실 창밖으로 폭우 때문에 흐려진 뒷산 숲의 전경이 보였다.
"얘기해 봐, 형 아직두 쌈박질 하고 다녀? 박지민이 뭐라구 안 해?"
정국이 움직일 때마다 복슬복슬한 머리카락 끝에서 약과 거즈의 냄새가 풍겼다. 나는 등산반에 들어서 산으로 들로 하도 쏘다니느라 정학을 먹었던 시절에 비하면 이쯤은 양호하다고 생각했다. 맞을 일이 생긴다면 맞지 말고 때리라는 게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싸나이는 지는 게 아냐. 놈을 때려눕히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지. 나는 그 '싸나이다운' 가르침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고 삔또가 나갈 때마다 아주 충실하게 이행했다. 그래도 전 학기에 비하면 이럭저럭 얌전하게 지냈으니 이번에야말로 상급반으로 진급을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정국은 사과를 아작아작 베어 먹으며 내가 가져온 만화책 중 하나를 골라서 펼쳤다.
"잠은 좀 잤냐?"
"응."
"이상한 꿈은 안 꾸고?"
"안 꿨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설레발은 곧 독이 된다는 말을 굳게 믿었으므로 나는 얼른 표정을 감추며 따라서 사과 하나를 꺼냈다. 단물이 많아 맛이 괜찮았다. 정국은 과일을 먹다 말고 껍질이 하얗게 일어난 아랫입술을 오물오물 씹었다. 마른 턱선 아래로 목줄기가 지나치게 도드라졌다. 나는 사과를 삼키며 유심히 관찰했다. 야위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 같은 표정과 썩 어울리지 않는 퀭한 눈. 링겔바늘도 없이 뒤집힌 손목 아래로 푸른 정맥이 튀어나왔고 그 정맥 한가운데를 흉터가 길게 관통하고 있었다.
"방학인데 하릴도 없어 보이구 형 너도 참 딱하다."
"언제쯤 퇴원해?"
"나두 몰라. 아무도 말을 안 해줘."
"학교에서 다들 네 얘기를 하고 있어."
나는 진심으로 말했는데 정국은 아주 신기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내가 제풀에 시선을 돌릴 때까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 말을 무슨 의미로 받아들였을까.
정국은 학교에서 특별활동에 속한 모든 운동부를 한 번씩 찔러본 후 심사숙고 끝에 축구부에 들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상급생들을 모두 제치고 에이스로 떠올라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농구도 잘 했고 육상은 물론 발야구와 수구에도 소질이 있었다. 가끔 미술반에 몰래 들어가 아무나의 스케치북에 무얼 찍찍 갈겨놓고 도망 나올 때도 있었는데, 얼마 뒤 다시 찾아가 보니 누군가가 정국의 낙서 부분만 뜯어서 고무줄로 곱게 말아 구석의 이젤 위에 세워 놓았다. 그런 것들로 미루자면 문예반과 신문반만 제외하고 모든 것에 능력이 닿는 신통방통한 놈이었다. 정국을 믿고 빵이나 사이다 내기로 심심찮게 재미를 봤던 축구반 부원들은 녀석이 언제쯤 돌아올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눈치였다. 더러는 내게 정국의 소식을 묻기도 했다. 진짜 속사정은 아무것도 모르고, 기약도 없이.
나는 사과심을 바구니에 집어넣고 정국에게로 몸을 돌려 양반다리를 했다. 정국은 만화책의 누른 때가 낀 종이를 손가락에 침을 묻혀 넘기고 있었다.
"다들 너 없으니까 재미가 없대. 네가 빠지니까 농구반 녀석들한테까지 축구를 진다는 거 아니냐. 그 새끼들 영 병신이야."
"원래 그랬잖아."
"사진반 애들한테두 질 놈들이다. 가만 보면."
"머저리들."
정국이 어깨를 들썩이며 킬킬 웃었다. 일주일 전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나는 그게 틀림없는 호전의 기미라고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 내년엔 진급할 수 있을 거 같아."
"형 네가? 그럼 박지민은?"
"걘 상급생 올라간 게 언젠데."
"J는?"
정국이 만화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던진 그 질문은 방심하고 있던 나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바구니 안의 새 사과를 뒤적이다가 속에서 뜨거운 게 울컥 치받치는 것을 느끼고 황급히 손을 빼냈다. 누가 설레발이 곧 죄라고 그랬던가.
"……그건 모르지."
"왜 몰라? J랑 얘기 안 해?"
걔도 한 번 더 유급하면 3년째잖아, 라고 되물으며 정국이 처음으로 나와 마주보았을 때, 나는 새벽달처럼 희끔한 그 얼굴에서 이미 오래전에 무언가 영영 빠져나갔음을 다시금 실감했다.
"모르겠어."
"왜 몰라."
"죽었으니까 모르지."
"죽어? 누가 죽어? 아무도 안 죽었는데?"
썩 놀라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정국은 읽던 만화책을 뒤집어 놓고 눈을 깜빡이며 거듭 물었다. 죽긴 누가 죽어, 아무도 안 죽었는데. 이해를 못하거나 아예 받아들이지를 않는다는 의미였다. 나는 코를 들이마시는 척하며 시선을 아주 피해버렸다. 그리고 내가, 또는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는 정국의 귀환이 사실은 영영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 한 가닥 희망이 살해당하는 짧은 정적을 깨뜨리고 정국이 무던하게 덧붙였다.
"걘 알아서 잘하겠지? 형보다야 똑똑하구 양아치 짓도 안 하니까. 아직도 신문반에서 기사 쓰구 수첩 들고 다니면서 취재하구 그러나? 걔 맨날 수첩에 코 박구 빽뺵하게 뭘 써놓구 그랬잖아, 아직도 그러려나."
* * *
벌써 몇 달도 전에 죽어버린 J가 우리의 화두에 아직까지 오르내리는 것을 보아하니, 억울하게 간 그 녀석의 원혼이 정국에게 붙어도 아주 단단히 들러붙어 버린 모양이다. 차라리 정국 대신 나에게 오는 게 백 배는 더 나았을 것이다. 불쌍한 새끼가.
정국이 정신병동에 갇힌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암시장 끄트머리의 머릿고기집 뒤쪽 움막에서 먹고 자는 늙은 박수에게 굿이라도 받아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지민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일랑 하지도 말라고 면박을 주었다. 한 술 더 떠서 날더러 미친놈이라고 욕을 했다. 야, 애가 충격을 받아서 맛이 간 거랑 귀신 붙은 거랑 같냐? 너도 진짜 미친 거 아니냐. 나는 화를 내는 대신 되물었다. 그래 네 말대로 다르다고 치면, 그러면 내가 뭘 해야 하는데? 지민은 대답하지 못하고 시무룩하게 내게서 등을 돌려 앉았다. 새로 받은 상급생 배지를 가슴팍에 달고서. 나처럼, 도무지 뭘 해야 좋을지 몰라서 초라해지는 등이었다.
말없이 그러고 앉아 있으면 죽은 J가 나타나 내 멱살을 움켜잡고 교모가 벗겨져 나가도록 마구 흔들어댈 것만 같았다. 지린내에 가까운 피 냄새까지 한 움큼 몰고 와서 악을 쓸 것만 같았다. 나를, 그 애를, 처음부터 그런 데 데려가지 말았어야지!
나는 문예반의 한 학년 선배인 남준에게 들은 대로 정국을 바다 위 절벽으로 데려가 몸에 소금을 뿌리는 상상도 했다. 오래 전 귀신이 붙었다던 남준네 외할머니를 처녀무당이 절벽 위에 단정히 앉히고, 고운 천일염을 온몸에 뿌려 주었더라고. 물론 남준은 내가 치료보다 주술에 더 가까운 그런 행위를 정국에게 써먹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추호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실은 잘 알고 있다. 정국은 귀신 따위가 들러붙은 것이 아니라, 아예 내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멀리 가버린 것임을.
이런 것들은 또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이야기인가? 나조차도 아직까지 악몽을 꾼다. 손바닥에 끈적끈적한 땀이 찰 떄마다 그게 말라가는 피의 감촉인 줄 알고 까물짝 놀라곤 한다. 내가 정국이었더라도 돌아버리지 않을 자신이 없을 만큼,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참혹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는 아주 처음부터 내가 정국을 좋아하게 되리라는 깜냥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아버지의 오래된 가르침이었다. 싸나이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절대로 겁쟁이가 되어서는 안 돼.
최초의 만남은 고등학교 입학식의 일렬종대였지만, 나는 어쩐지 우리가 아주 오래 전부터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서울내기들 사이에서 유달리 튀는 사투리 덕분에 느낀 공감대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입학 첫 날부터 금세 유명해졌다. 정국은 '자갈치시장을 누비던 부산갈매기'라는 화려하고 우스꽝스런 수식어를 선사받았고 나는 거창 출신의 또라이였다. 갓 상경한 시골뜨기 취급을 받기 싫었으므로 나는 일부러 운동부 애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땀 흘리며 뛰어다니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곧잘 학생모의 챙을 안으로 꺾어 쓰고, 한두 학년 상급생인 그들과 함께 특활반 교실에서 술을 까먹거나 담배를 피우곤 했다. 주말이면 진짜로 등산장비를 챙겨 산간을 돌아다니며 암벽등반도 했고 먹을 것을 잔뜩 싸가서 하루 종일 빈둥거리기도 했다. 한편 정국은 농구반과 수구반, 야구반, 내가 속한 등산반 등을 잇달아 돌아다니면서 두루두루 얼굴을 익혔고 얼마 못 가서 선배들의 까불거리는 귀염둥이가 되었다. 축구반을 제외한 다른 서클에는 들지 않았지만 일단 적당히 친해지고 나면 타고난 넉살과 재치가 봐줄 만했다. 수업시간마다 선생들의 눈치를 거스르지 않는 범주 내에서 아이들을 한 차례씩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것도 정국의 역할이었다.
시커먼 교모 그림자에 반 넘게 가려져 있어도 누구든 알아볼 수 있는 예쁘장한 얼굴 또한 유명했다. 어릴 적 잠깐 부산에서 살았다던 지민은 정국을 곧잘 '이삐'라고 불렀다. 이삐야, 이삐야. 이쁜이의 사투리라고 했다. 정작 정국 본인은 계집애처럼 생겼다는 말을 듣기 싫어해 근육을 키우겠다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떡대가 잘 잡히는 체질이었는지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날 무렵에는 처음 만났을 적보다 어깨가 제법 그럴싸하게 벌어졌다. 그 즈음 나는 자잘한 일탈에 단단히 맛을 들여 교실에 얌전히 앉아있는 것을 온몸으로 거부하던 짬이었다. 나는 짜장면과 군만두와 사이다를 시켜서 별관의 사람이 잘 나다니지 않는 계단참에 앉아 정국을 기다렸다. 십 분쯤 그러고 앉아 있으면 가끔 수업중일 때에나 쓰는 안경 차림으로 정국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우리는 마주앉아서 전쟁처럼 차려진 음식들을 재빨리 해치웠다. 먹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개들처럼 그랬다.
여느 때처럼 사이다 두 병을 거뜬히 비우고 입가를 훔친 정국이 이런 말을 했던 적도 있었다. 나는 꽃빵을 입에 문 채 멍청하게 정국의 얼굴을 마주보았는데, 말의 내용을 몰랐더라면 뭔가 아주 교묘하고 야릇한 제안을 건네는 사람처럼 보였을 표정이었다.
수업 끝나구 시장 옆에 극장에라두 갈래? 오늘 재미난 거 한다는데.
난 영화 같은 거 안 본다.
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해도 정국은 굽히지 않고 빙글빙글 웃었다.
재밌을 걸? 형 너는 그 나이 먹구 문화생활도 안 해봤냐? 양아치 새끼.
얼마 못 가서 나는 정국과 일주일에 한 번씩 극장 뒷문으로 숨어들어가 영화 한 편씩을 보고 나오는 것을 취미로 삼게 되었다. 내가 주워듣고 오는 영화 소식이나 줄거리를 들어주던 정국은 새로이 발견한 나의 취향을 낄낄거리며 놀려댔다. 양아치 새끼가 소녀 같은 취향두 다 있네. 근지럽게. 우리는 말을 타고 밧줄을 휘두르며 총을 쏘는 코쟁이들 영화도 보았고 야한 영화도 보았고 근질근질한 사랑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보았다. 입구 뒤 매대에서 오십 원짜리 동전 하나를 주면 설탕 꽈배기나 사탕 쪼가리, 가끔은 국산담배도 몇 개비 얻어서 피울 수 있었다. 주전부리는 반겼지만 흡연에는 민감하던 정국이었으므로 나는 그 애 앞에서 되도록 담배를 삼갔다. 그렇잖아도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스크린의 빛을 받아 빛나는 정국의 예쁜 옆얼굴이 담배 연기 때문에 무럭무럭 흐려지는 꼴은 원치 않았다. 아마 그것이 내 나름의 순정이었던 모양이다.
정국은 나처럼 공부에 썩 흥미를 붙이지 못하는 쪽이었으므로 2학기 기말고사부터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날까지, 나와 함께 꽤 긴 장기결석을 감행했다. 우리는 교복을 입고 가방까지 챙겨서 학교 가는 것처럼 태연스레 집을 나와, 약속된 장소에서 만난 뒤 가고 싶었던 곳을 몽땅 돌아다녔다. 혹시 부모님과 마주칠까 봐 읍내나 시장 쪽은 되도록 피하고 대신 산이며 계곡, 들,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하는 근교까지 자유롭게 놀러 다녔다. 한 번이라도 시험을 빼먹으면 유급 확정이었으나 나는 정국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이 너무도 재밌고 즐거워 도저히 진급 따위로 아까운 시간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싶지 않았다. 어찌나 오래 걸었는지 구두코가 금세 다 닳아서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놀고먹고 실컷 구경하며 일탈을 즐기다 아주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마주친 지민은 나와 정국을 번갈아보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둘 다 아주 깜둥이가 됐구나.
앞코가 다 까진 구둣발을 들어 보인 정국이 나를 슬쩍 곁눈질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낄낄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꼴을 지켜보던 지민이 다시 혀를 찼다.
난 너네가 저기 설악산에라두 들어가서 영영 안 돌아올 줄 알았는데!
모범생이었던 녀석은 제때 상급반으로 진학해 우리와 아예 다른 교사를 쓰게 되었지만, 그 후에도 심심하다는 명목으로 곧잘 우리가 있는 하급반 교사를 드나들었다.
이쯤에서 J에 관해 좀 더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야겠다. 씩씩하던 정국이 현실을 피해 달팽이처럼 깊숙이 오그라들도록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J는 나와 정국처럼 낙제하여 하급반에 남아 있었으나 우리와는 그다지 친해질 까닭이 없는 부류였다. 신문반에 들어서 날마다 가죽양장 수첩에 뭘 끼적거리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나는 기자와 글쟁이야말로 장광설에 가장 유력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했지만 J를 보고 있자면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나나 정국은 달변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하고 싶은 말은 재주껏 정확하게 전달하는 편이었는데, J는 자신의 어눌한 말씨에 대해 늘상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수첩 페이지마다 그토록 새까맣게 글자들을 채워 넣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입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손이라도 부지런해야 했을 테니까. 정국은 두꺼운 안경을 쓰고 행동이 굼뜬 J를 간혹 심하게 놀리곤 했으나 편한 사람을 대할 때 그 애의 태도는 항상 그런 식이었으므로, 누군가가 그런 일을 문제 삼은 적은 없었다. 정국의 장난에 악의가 없다는 것은 멍청이가 아닌 이상 누구든 쉽게 알 만한 사실이었다.
내가 정국의 옆모습을 몰래 훔쳐보느라 반 넘게 날려버린 영화 장면들보다도 더 깊게 뇌리에 새겨진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J와 정국과 함께 내달리던 시청 앞 광장 거리의 풍경이다. 피와 연기와 탄내와 유리조각이 난무하던 그 길. 날씨는 맑음. 바람은 거의 없고 대기는 건조. 유급 후 두 번째로 맞이한 봄이 완연했다.
달력에서 찢어 버린다 해도 결코 찢어질 수 없는 날이었다. 도화선을 당긴 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점심시간을 넘기면서부터 어디선가 총포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폭발음이 연이었다. 모든 야외수업은 취소되었고 몇몇 상급생 반이 뒤집어졌다. 상급생 여럿이 하급반 교사를 돌아다니며 우리도 거리로 나가야 한다고 외쳤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가운데 나는 복도에서 황망하게 서성거리는 지민과 마주쳤다.
대학생들이 지금 경찰이랑 싸운다고 난리래. 총질도 하고 최루탄을 사람에게 그냥 던진대. 모르겠어. 가면 죽을 게 뻔한데 안 가면 배신자가 되는 기분이야.
운동장 쪽으로 난 창가에 달라붙어 내려다보니 두건이나 손수건 따위로 얼굴을 싸맨 대학생들이 학교 주변의 골목길을 제각기 바쁘게 내달리고 있었다. 몇 명은 담장을 뛰어넘어 우리 학교의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후퇴하는 레지스탕스처럼 보였다. 시청 광장 쪽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지 먼 풍경이 묘하게 흐물거렸다. 선생들이 회초리를 휘두르며 우리를 교실로 몰았으나 오후수업은 마지막 일 교시를 남겨두고 일찍 끝나 버렸다.
하교길에 정국과 함께 광화문에서 시청으로 이어지는 대로변을 걷고 있을 때, 우리는 여느 때처럼 갈색 양장수첩을 보물처럼 꼭 쥔 J를 만났다. 학교 밖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친하지도 않았는데 썩 반가웠다. 교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소란스럽고 불안한 분위기였다. 곳곳의 유리창이 깨져 있었고 화염병 때문에 파출소에 불이 붙어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다. 사람들은 지프와 버스를 가득 메우고 더러는 버스 지붕 위에까지 걸터앉은 채 시청으로 몰려갔다. 운전석 옆에 태극기들이 꽂혀 있었다. 인도와 보도의 구분이 사라져 우리도 아무렇게나 연석을 밟고 지나다녔다.
야아, 너 여기서 뭐하냐?
내가 등을 내리치며 묻자 J가 화들짝 돌아보았다.
취재할 거야.
이걸? 어떻게?
직접 가봐야지.
나는 J의 처음 보는 대담함에 놀랐고,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빛나는 그의 결연한 눈빛에 다시 한 번 움찔했다. J는 우리를 내버려두고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 보자. 나는 정국의 팔을 찌르며 말했다. 겁먹은 토끼 같은 얼굴의 정국은 나와 J의 뒷모습을 번갈아 본 뒤 천천히 뒤따라왔다. 나는 그 표정이며, 약간 내키지 않아하는 듯한 발걸음이 몹시 귀엽게 여겨졌으므로 지금이라도 발길을 돌려서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전경이 총을 쏘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수 차례의 경고사격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부분 씩씩하게 행군했으나, 곧 그 행렬은 머리를 돌려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우리 쪽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몇몇이 총에 맞아 쓰러진 게 틀림없었다. 최루탄이 터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우리는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는 정국과 손을 맞잡고 있었고 정국은 J의 교복자락을 붙들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이쪽으로 달려오자 가장 발이 빠른 정국이 우리를 끌고 앞서서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럭저럭 정국과 속력을 맞추었고 어떻게든 그 애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총탄으로부터 살리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터무니없이 느렸던 J만 빼고. 정국이 자꾸 뒤쳐지는 J를 악착같이 끌고 달릴 때 사람들이 모두 골목으로 빠지는 바람에 큰 길은 거의 텅텅 비었다. 어느 결에 나는 내가 혼자 내달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자 저만치 뒤에서 J의 손을 잡고 쫓아오는 정국이 보였다. 거의 동시에 J가 풀썩 고꾸라지면서, 녀석의 머리 절반이 총에 맞아 돌팔매처럼 부서져 날아갔다.
안 돼!
순식간에 피를 흠뻑 뒤집어쓴 정국이 울부짖으며 J의 손을 놓고 외로 기어갔다. 나는 그게 총알을 피해 방향을 바꾸어 달아나는 것인 줄만 알았으나, 정국은 비명을 지르며 핏덩어리가 쏟아진 바닥을 손바닥으로 마구 헤집었다. J의 날아간 머리 파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정국을 안고 일으켜 세우자 J의 선지피가 내 손바닥을 흠뻑 적셨다. 내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정국의 뺨을 억지로 붙잡고 몇 대 후려갈겼다. 그러자 정국의 손에서 큰 핏덩이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나는 자기가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한 정국을 질질 끌고 달아났고 그 애는 이미 숨이 끊어진 J를 자꾸 돌아보며 붙여야 해, 붙여야 해, 하고 가냘프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문이 열려 있는 어느 건축사 건물로 기어들어가 화장실에서 얼굴을 닦았다. 눈물범벅으로 엉망이 된 정국의 얼굴을 씻기고 옷에 묻은 피를 박박 문질렀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손톱 밑에까지 엉겨붙은 피딱지를 긁어내느라 온 정신을 쏟아부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국이 내 몫까지 너무 울어버렸기 때문인지 오히려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 애를 끌어안고 밖에서 전경이나 군인 아닌 사람들이 돌아다닐 때까지 숨죽여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서 지옥으로 들어선 것 같았다. 덜덜 떨리는 어깨를 보듬어 안고 아기 어르듯 몸을 살살 흔드는 것 말고 무엇을 해주는 게 최선이었을까.
* * *
빗줄기가 다소나마 잦아들 때까지 나는 정국의 병실에 앉아서 사과를 나눠 먹고 만화책을 뒤적였다. 면회 시간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국은 침대 위에 엎드려서 두 발을 허공에 쳐들고 달랑거리다가, 내 팔뚝을 꾹꾹 찌르며 자신이 언제쯤 퇴원할 수 있을지 예측해 보라고 했다.
"너도 모르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목이 메는 것을 참고 대꾸했다. 정국의 환자복이 헐렁하게 남아도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탄탄했던 근육이 서서히 쪼그라드는 중이었다.
"그래도 요즘은 밤에 잠이 좀 잘 오는 것 같아."
"이제 꿈은 안 꾸는 거야?"
"응. 그나저나 J한테 빌린 문학필기를 아직도 못 돌려줬네."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되짚듯 중얼거리는 정국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이런 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도 알 수 없었다.
"퇴원하면 꼭 돌려주겠다구 말 좀 전해주라, 응? 비겁하게 이런 걸로 땡쳐 먹지 않는다구."
"정국아."
"응."
"J는 죽었잖아."
"좀 다쳤긴 했지."
"다친 수준이 아니지. 총 맞아서, 죽었는데……."
말끝을 흐리는 나를 되레 근심스레 바라보던 정국이 문득 내 귀로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형 너는 좀 숨어있다 나가야겠다. 지금 저 밖에 총 든 경찰들 막 돌아다니는 거 보여? J를 그 꼴로 만든 놈들이 활개치구 돌아다닌단 말이야. 아무한테나 막 쏴갈겨. 형도 다치기 싫으면 여기 좀 숨었다가 가, 응?"
* * *
J는 인생을 송두리째 잃었고, 그 풍파가 정국에게까지 몰아닥쳐 그 애는 매일 밤 눈을 붙일 때마다 자신과 손을 맞잡은 채 머리가 날아가는 J의 꿈을 꾸었다. 깨어나고 나면 등교도 못 하고, 손톱 밑에 까맣게 낀 피딱지를 박박 문대 지우면서 J를 찾는 것이 반복되었다. 그 사고가 있었던 날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진 J는 다음날 오후 곧장 관에 들어갔다. 나는 지민을 비롯한 몇몇 동급생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무르고 허전한 향 냄새. 비단 J뿐만 아니라 총이나 최루탄 파편에 맞아 죽은 다른 이들의 장례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곡소리가 몹시 시끄러웠다. 영정사진에 정국의 얼굴을 덧씌워 보며 나는 불안함에 어금니를 딱딱 부딪쳤다.
절을 하고 난 후 문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지민이 나왔다. 녀석은 나를 한 번 돌아보지도 않았다.
정국이는 무슨 죄냐.
나는 굳게 다물렸다가 시무룩하게 벌어지는 지민의 입술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런 일을 겪고 미치지 않는 게 더 말도 안 되는 거야.
…….
걔가 대체 뭘 했어? 뭘 했다구 그런 꼴을 당해야 해?
나는 차라리 지민이 나를 한 대 갈겨주길 원했으나 지민은 한참 입술을 씹으며 나를 바라보다가 벌개진 눈을 하고 도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뒤로 다시는 하급반 교사의 1학년 복도에서 지민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대부분의 친구들을 따라 일 년 늦게 상급생으로 진학하여 정말로 하급반에 아무런 볼일이 없어질 때까지,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 정국의 책걸상이 창고로 들어갈 때까지, 지민은 끝끝내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 * *
환자 면허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소방차의 종소리처럼 빠르고 유별났다. 나는 되도록 살며시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싸구려 매트리스는 작은 움직임에도 심하게 출렁거렸다. 벗어놓은 교모를 다시 쓰고 가방을 쥐었다. 채찍처럼 쏟아붓던 빗줄기는 거의 끊길 듯 가늘어져 있었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사과 한 알을 주워 건네주자 그것을 받아든 정국이 투명하게 웃으며 물었다.
"다시 올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정국의 바싹 마른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해주고 싶은 마음이 사무쳤는데 이제야 이렇게 했다. 아무 의미도 보람도 없이. 멀쩡했을 때의 버릇대로 머리를 흔들어 내 손길을 떨쳐낸 정국은 아이마냥 손을 흔들었다. 헐렁한 소매가 흘러내려 손목 아래의 물고기 아가미 같은 자상이 다시 드러났다. 나는 뒷걸음질로 복도까지 나와 문을 닫았다. 정국이 경찰이라고 착각했던 간호사 두 명이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곁을 지나쳐 갔다.
이제는, 이쯤이면 좀 울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우는 대신 길고 희고 미끈미끈한 복도를 천천히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곳은 괴물의 목구멍이고 나는 정국을 구하러 괴물의 뱃속으로 자진하여 들어간다는 상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두 뺨은 여전히 건조하게 말라 있었다. 나는 끝까지 울지 않았지만 대신 내 속에서는 무언가가 박살났다. 아주 뜨거운 액체가 쏟아져 뱃속까지 질질 흘러내리는 느낌이 나를 휘감았다.
* * *
끔찍하게 덥고 습했던 여름날이 또 있었다. 그 땐 장마조차 오지 않았다. 불볕더위만 밤까지 이어졌다. 그 무렵 아직 입원처분을 받지 않았던 정국은 매일밤을 악몽에 시달리며 집에서 쉬고 있었다. 학교에 얼굴도 못 비춘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나는 하교하자마자 유리병에 담은 얼음냉차를 사서 정국의 집으로 찾아갔다. 우리가 그간 못 본 영화가 몇 편이나 쌓여 있었으므로 정국의 상태만 괜찮다면 극장에라도 나가볼 요량이었다.
죽은 듯이 고요한 정국의 집 대문 앞에 서는데, 불현듯 누군가를 마구 찌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갈 곳을 잃은 파괴적 충동을 삭히느라 나는 초인종도 누르지 못하고 한동안 대문 앞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너무 북받쳐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가슴팍의 욱신거림이 좀 잦아들 즈음에야 나는 정국이 그러하듯, 입술을 오물거리며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
정국아, 집에 있어?
문이 열려 있었다. 오랜 비밀을 간직한 성채처럼 칠 벗겨진 녹색 대문이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어지럽고 좁은 현관에서 이어지는 거실, 방문은 거의 다 닫힌 채였고 삼분의 일쯤 가려진 부엌이 보였다. 정국이 신던 학생구두와 운동화 따위가 마구 엉켜 나둥그러져 있었다. 나는 두꺼운 침묵 속으로 한 걸음 더 파고들었다. 전정국? 없는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방문을 전부 열어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대문까지 열어놓고 어딜 갔을까. 나는 양말 신은 발을 꼼지락거리며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거실 구석의 맨바닥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기다렸다. 삼십 분쯤 혼자서.
요컨대, 소변이 마려워 아무 생각 없이 변소 문을 열었을 때가 그 심심한 저녁의 대단원이었던 것이다. 파리와 모기떼가 유독 들끓고 장독대가 녹아내릴 듯 습했던 밤. 점차 기다림에 지친 나는 더위먹은 개마냥 숨을 헐떡였다. 목덜미 둘레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그리고 변소 안에서 발견한 정국은 나보다 훨씬 더 흠뻑 젖어 있었다. 큰 대야에 손목을 담그고 이상한 자세로 엎어져 있었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짐작을 못하겠다. 생기를 잃은 몸에서 나온 것치고는 쿨쩍쿨쩍 뿜어나오는 피가 지나치게 새빨갰다. 얼마나 난도질을 했는지 쩍쩍 벌어지는 상처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는 정국의 뺨을 내리치다 말고 팔뚝을 온통 핏물로 적신 채 엉금엉금 변소에서 기어나왔다.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서기도 힘들었다. 전정국, 전정국, 전정국……아니 죽으면 안 되는데……안 되는데……구석에 있는 낡은 수화기를 찾아내 다이얼을 돌리는데 손가락이 번번이 미끄러졌다. 단추마다 붉게 피 찌꺼기가 끼었다. 누군가가 저 너머에서 응답하자마자 나는 비명을 질렀다. 여기 사람이 죽어요. 사람, 사람이…… 수화기를 집어던지고 변소로 달려가 정국을 질질 끌어내서 들쳐 업었다. 핏물이, 정국의 죄책감이, 후회가, 두려움이 와르르 철벅이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나는 무겁기 짝이 없는 정국을 업은 채 현관의 문지방에 머리를 박고 맨발로 뛰쳐나와 골목길을 내달리면서 울었다.
평생 살면서 그토록 뼈에 사무치는 절망을 곱씹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나는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주겠다고 결심했는데. 네가 포기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함께 붙어온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정국의 세상에 조금쯤은 내 자리도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 나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줄줄 흐르는 땀에 섞여 미친 사람처럼 눈물이 나왔다. 나도, 나도 여기 있어. 네가 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야. 나도 네 세상에 있어…….
큰길까지 나왔을 때에야 나는 구급차와 마주쳤다. 그들은 정국의 집으로 통하는 골목길로 막 접어들려던 참이었다. 그 날, 길가 군데군데에 커다란 얼룩처럼 쓰러져 있던 사람들, 피를 흘리는 J와 부상자들과 시체들을 싣고 갔던 바로 그 구급차임을 나는 단박에 알아보았다.
* * *
전정국의 생명의 아가미. 나는 이제 그 주저흔을 그렇게 여기기로 한다. 필사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폭우가 거의 그쳤다. 병원 입구의 처마에서 낙숫물이 똑똑 떨어졌다. 내 발걸음을 따라 크고 작은 웅덩이들이 이지러졌다. 교복 바짓단이 새까맣게 젖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병원 앞에서 그나마 새로 다듬은 길을 따라 십 분쯤 걸어가면 오래된 초록색 버스를 탈 수 있는 간이정류장이 나온다. 누굴 만나러 왔는지 국민학생쯤으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나보다 먼저 그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의 둥근 눈이 나를 향했다. 스물 대여섯이나 먹었을까 싶은 젊은 엄마의 눈도 소리 없이 내게 닿았다. 순하디 순한 양의 눈이었다. 총과 폭탄 몇 개로 학살당하기에 가장 적합한 눈이었다. 나는 저것과 꼭 비슷한 수십 수백 개의 눈동자들과 어울려 지냈던 얼마 전의 평화로운 시절을 떠올린다. 내가 너를 지켜준다는 건 사실 세상에서 가장 유약하고 허무맹랑한 약속일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수많은 양떼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초전박살난 네 세상을 어설프게나마 복구해 주는 것도 하지 못하고.
털털거리는 차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진흙과 물을 튀기며 초록색 버스가 올라온다. 도중에 작은 구덩이라도 만났는지 한 번 위험스레 휘청거린다. 저 버스를 타고 나는 다음 주 이맘 때쯤에 다시 정국을 찾아와서 무슨 말이든 걸어야 한다. 묻고, 대답을 듣고, 확인한 후에는 또다시 체념할 테지.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기 때문에 나는 차분히 며칠 뒤에 반복될 비슷한 일상을 머릿속으로 그려 본다. 나마저 저버리면 정국은 정말 죽은 애가 되고 만다. 혼자 뒤에 남아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버스가 흙탕물을 튀기며 내 앞으로 와서 멈춘다. 열린 문 안으로 올라서는 순간 귓가에서 짧은 이명이 윙, 하고 울린다. 나는 맨 뒷자리로 걸어가 텅 빈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앉았다. 그리고 붉은 벽돌로 지은 멋없는 병원 건물이 내 시야에서 아주 사라질 때까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웅크린 채 소리 죽여 흐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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