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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 뒷골목

 정육점 뒷골목

* 뷔국

 

 

 

 

 

  나는 전정국의, 그 애와 꼭 닮은 얼굴의 아버지를 알고 있다. 닮았다는 것이 순전히 외적인 부분에만 국한된 말이라면. 까딱하면 키스하는 데 걸리적거릴 것처럼 높은 콧대와 둥근 콧망울과 큰 눈동자. 거기까지라면. 속알맹이는 전혀 닮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놈을 전정국의 아버지로 한 번도 여긴 적이 없다. 친부라는 단어는 관계를 명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의미한 고유명사처럼 다가올 뿐이다. 사실 그도 나를 하나뿐인 '아들'의 친구 따위로 쳐주질 않았을 테니 피차 마찬가지다.

 

그리고 전정국은 이제 자신의 아버지에게조차 진짜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 불쌍한 전정국. 그가 만약 전정국의 남은 멘탈을 전부 밟아 부숴서 재기불능으로 만들 생각이었다면 대단히 성공한 셈이다. 썩은 동앗줄이나마 얼마간 늘어뜨려 주고 있다가, 반쯤 기어 올라왔을 때 칼로 잘라버린 격. 줄 사람을 잃어버린 전정국의 애정은 물에 빠진 지푸라기라도 부여잡겠다고 가늘고 길게 명줄을 이어왔지만, 쌍방이 아니니 이미 오래 전에 결론이 나버렸다. 아빠, 아빠아, 머리카락에서 찬물을 똑똑 흘리며 우는 전정국을 계단 위에서 무감하게 내려다보던 눈, 죽은 생선을 내려다보는 눈길도 그처럼 무심하진 않았을 거다.

 

전정국에게 있어서 아빠라 함은, 자신에게 최초의 숨과 최초의 절망을 함께 안겨준 사람, 대충 그런 의미일까? 그런 것도 아빠라고 할 수 있나? 보통은 먹여살리고 옷을 입혀주고 키워주는 부양의 행위까지 포함하지 않던가, 하지만 후자를 생각한다면 나야말로 전정국의 진짜 '아빠'였다. 전정국은 집에서 세간살이가 하나씩 부서질 때마다 우리 집으로 도망와서 치킨을 시켜 먹었다. 나는 그 날을 위해 아껴둔 용돈을 풀었다. 돼지저금통의 배를 째고 동전과 지폐를 양 손 가득히 꺼낸 뒤 먹고 싶은 것을 전부 다 시키라고 했다. 괜찮아, 짜장면도 먹고 피자도 먹고 과자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자. 다 사줄 수 있어. 하지만 치킨박스를 열고 첫 닭다리를 입에 문 채 전정국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게 내 앞에서 보인 처음이자 마지막의 서러운 눈물이었다.

 

너무 아파. 어디가 아픈데? 여기, 여기 다. 그러면서 전정국은 옹송그리고 앉은 자신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가리켰다. 낡은 추리닝 바지로 덮인 앙상한 다리가 상처투성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약 발라줄까? 엄마가 찬장에 넣어두는 구급상자를 떠올리며 물었다. 우리 엄마는 약을 많이 갖고 있으니까 너도 빨리 나을 거야. 하지만 전정국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약을 발라서 빨리 나을 상처가 아니라고 했다. 생각해 보면 전정국은 너무 빨리 철이 들었고, 너무 성급히 조숙해졌다. 다 어쩔 수 없는 결과였을 테지만.

 

전정국과 아주 똑같은 얼굴의 그는 동네에서 아무데나 좆 휘두르고 다니는 난봉꾼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좁은 동네였으니 소문은 날개 달린 말이 아니라 숫제 용처럼 날뛰었다. 덕분에 전정국은 다섯 살 생일 날, 분노한 아내에게 칼침을 맞은 이혼남의 아들이 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동네에 있는 모든 애 딸린 아주머니들이 전정국을 동정했다. 최소한 겉으로는 모두가 진정으로 보였다. 유일하게 믿는 구석이었던 잘난 얼굴에 가위를 비껴 맞은 남자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광대뼈 위에 달고 살았는데, 전정국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졸리면 아빠 곁에 누워 그 상처를 매만지며 잠이 들었다고 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울퉁불퉁한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단다. 나는 그 감촉을 전정국이 하루 빨리 잊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전정국은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부자간의 마지막 남은 정이라고 생각했는지 미련을 못 버리더라. 더 불쌍하게. 그 애는 유치원도 못 갔다. 아내를 잃은 남자는 밖으로 나돌았고 매번 여자를 바꾸어 집에 데리고 왔다. 그럴 때마다, 돌이키기 싫은 과거의 산물인 아들이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전정국은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나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매일 놀이터에서 전정국을 만나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하릴도 없이 미끄럼틀을 몇 번씩 타고 그네에 걸터앉아 빈둥거리고 있으면 늘 춥게 입은 전정국이 주춤주춤 놀이터로 걸어들어왔다. 그러면 나는 함께 놀던 친구들도 모두 뒷전으로 버렸다. 내가 기다리던 것은 그 애뿐이었다.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이고 씻기고 내 옷을 빌려주었다. 그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공주를 지켜주는 기사가 된 기분으로, 발끝에서부터 조금씩 뿌듯하게 차올라서.

 

하루는 조개를 넣어 된장찌개를 끓여준 엄마가 나를 방으로 불렀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어른들이 실은 전정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아버렸다. 엄마의 표정이 더없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태형아, 정국이 자꾸 집에 데려오지 마. 우리 태형이가 착하니까, 불쌍한 친구라서 그러는 건 알겠는데, 엄마는 좀 그래. 엄마가 차마 꺼내지 못하고 뒤로 삼킨 말이 무엇인지 나는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세 살쯤 더 자란 것 같았다. 나는 엄마의 등 뒤로 약간 열려있는 방문을 보았다. 그 틈새로, 아무것도 모르는 전정국이 부엌 식탁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까맣고 얌전한 머리. 동그란 뒤통수. 그리고 붉게 터서 갈라져 있던 전정국의 손등이 떠올랐다. 나는 파도에 떠밀리듯 서글퍼졌다. 엄마, 그런 말은 하지 마. 엄마의 난처한 눈을 분명히 마주보며 말했다. 내가 없으면 쟤는 죽을지도 몰라.

 

"날 볼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나서 힘들대."

 

전정국이 아빠보다 엄마를 더 닮았다는 말인가. 나는 아버지라는 작자와 판박이라고, 모욕당하는 기분으로 생각했는데. 그러자 기억에도 없는 전정국네 엄마의 얼굴이 몹시 궁금해졌다. 전정국만큼 예쁘장하고 오밀조밀하게 생겼겠지.

 

대체 어디서 그런 사명감이 피어났는지, 나는 전정국의 손을 붙잡고 용감하게 그 애의 집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랬던 적도 있었다. 전정국은 내게 손을 꼭 붙잡힌 채 안절부절 못했다. 아빠가 싫어할 텐데, 우리 아빠가, 친구 데려오는 거 싫어하는데. 그래도 말은 또박또박 하던 애가 갑자기 한껏 침울해지고 어눌해졌다. 나는 믿을 구석도 없으면서 씩씩하게 달랬다.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특별일기를 쓰느라 일기장에 그림을 그리거나 색종이로 뭘 만들어 붙이는 숙제가 있던 날. 손재주가 없는 나는 색종이 몇 장과 가위를 들고 전정국과 낑낑거렸다. 거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는데 그 남자가 나타났다. 찬 바람을 한 움큼 안고서. 전정국의 아버지는 오도카니 앉아 있는 우리 둘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아빠, 아빠. 전정국이 발딱 일어나 어쩔 줄을 몰라하며 현관으로 나갔다. 그래도 안기지는 못했다. 눈치만 봤지.

 

그는 우리가 늘어놓은 것들을 쓱 훑어보고는 색종이 한 장을 들고 가위질을 시작했다. 싹싹 오려낸 종이에서 장미도 나오고 백조와 물고기도 나왔다. 지켜보던 전정국의 눈이 금세 초롱초롱해졌다. 그는 전정국에게 만들어낸 것들을 쥐여 주고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전정국은 한 번 돌아보지도 않는 그의 등에다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빠, 고맙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랬던 시절도 있긴 있었다. 전정국이 썩은 동앗줄이나마 붙들고 기어오르게끔 도와준 원동력이 그런 뜨문뜨문한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아빠 재혼하거든. 우리 집 주인 아줌마랑."

"……."

"그래서 이제 나보고. 그냥 눈에 안 띄게 멀리 나가서 살래. 나타나지도 말고."

 

전정국은 심이 다 닳은 연필을 억지로 끼적이듯 말한다. 너비 한 뼘 정도의 그늘이 전정국의 이마 위로 쏟아진다. 숨이 막힌다. 후덥지근하다. 엉덩이를 삼십 센티만 더 옆으로 옮기면 전정국이 네 명을 때려눕혔던 바로 그 추억의 옥상 바닥이다. 담뱃불을 지져 끈 흔적과 마른 가래침이 어지럽게 얽혀 있다. 옥상문을 잠근 것은 나였다. 선생들이 보면 안 되잖아. 정국아, 복수해.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전정국은 내가 도와주는 가운데 그토록 지저분한 곳에서 지저분하게 싸웠다. 내가 왜 남창새끼 자식이야, 개새끼들아, 욕을 하며 아구창을 때리고 발로 걷어찼다. 잘 싸우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많이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다시 우리 집으로 가서 밤늦은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쥐어터진 꼴로는 아빠가 창피해한다며 결코 제때 귀가하지 못했으니까. 아마 그 남자는 눈엣가시 같은 아들이 자꾸 밖으로 싸돌아다니니 속이 편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불안해했을지도 모른다. 혹여 아들이 갑자기 재혼식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와서 아빠는 빌어먹을 개새끼라며 소리라도 고래고래 질러댈까 봐.

 

내가 실수로 엄마 얘기 한 적 있었는데 그게 싫었나? 근데 나 이젠 진짜로 엄마 얼굴 생각도 잘 안 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두 모르는걸. 전정국은 재주 없이 말허리를 붙여나가다 말고 고개를 떨어뜨린다. 사람이 뻔히 보고 있는 앞에서 대체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내가 이런 꼴 보자고, 이런 소리 듣자고 기어이 너 찾아서 예까지 올라온 줄 아나. 땀 한 줄기가 목을 타고 쪼르르 등판까지 굴러떨어졌다. 날개뼈를 굴러내려가는 감각이 간지럽고 소름 끼친다. 덥다. 숨이 막힌다. 후덥지근하다. 내가, 내가 너무 커버려서, 내가 아빠를 불편하게 해서……너무 눈에 잘 띄어서 그랬나……갓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어눌하게 중얼거린다.

 

전정국의 생모는. 전정국과 너무 닮아서 전 남편이 지금까지도 미워한다는 그 여자는. 남편의 바람기에 진저리를 치며 집을 떠나버린 후 한 번도 아들에게 연락을 준 적이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도 일러주지 않았고 모든 걸 떠넘긴 뒤 홀가분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를 욕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을까.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 같았다. 이제는 전정국의 상상 속에서만 사는 인물처럼. 전정국의 아버지는 아내의 사진을 모조리 긁어다 쓰레기통으로 처넣었다. 몰래 쓰레기통을 뒤져 사진을 꺼내어 숨겨두었던 전정국은 들켜서 몹시 후드려 맞았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며칠을 울었던 다섯 살의 전정국. 내복 차림으로 몇 번 쫓겨난 뒤에는 울음도 싹 사라졌다. 내가 그 애를 처음 집에 데려왔던 날에도 전정국은 아직까지 선명하게 기억나는,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하늘색 내복을 입고 있었다.

 

"나 진짜 죽어버려야 돼?"

"그런 소리 하지 마."

 

한 번만 더 못된 소리 하면 나한테 혼나. 전정국은 질문의 내용과 동떨어진 표정으로 눈을 땡그랗게 뜬다. 저런 표정도 내게는 그저 좆같았던 날들의 기억을 헤집어 끌어올리는 데 지나지 않는다. 해소제가 필요했다. 죽는다는 소리, 빈 말이라도 한 번만 더 지껄여 봐. 날붙이란 날붙이는 죄다 부러뜨려 버렸어야 했다. 하다못해 감자 깎는 칼 따위라도.

 

"태형이 형."

"……."

"화났어?"

 

형은 나한테 화내면 안 되지.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쓰레기라고 욕해도 형만큼은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전정국은 눈으로 그렇게 말한다. 쟤가 나를 뜬금없이, 따지지도 않던 나이를 상기시키듯 꼬박꼬박 형이란 수식어를 붙여 가며 부르면, 무언가 바라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뭔지 잘 안다. 그건 나도 항상 원하던 것이었다. 일어나. 나는 먼저 일어나서 엉덩이를 툭툭 털고, 전정국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무척 말라서 단단한 뼈와 가죽만 한 손에 뿌듯이 쥐여진다. 일어나서, 가자. 늘 가던 데로. 나는 이런 말을 할 때 이제 태연하고 침착하게 굴 수 있었다. 전정국은 대답 대신 입술을 오므려 입가에 작은 보조개를 만들었다.

 

 

 

 

 

  아무래도 발정난 개로 커버린 것 같았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전정국 얘도. 동네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 있는 낡은 정육점 뒷골목. 길기는 오질나게 긴데 끝이 막다른 길이고 사람 사는 집도 없어서 아무도 나다니지 않는 곳. 옥상 바닥보다 배는 더러웠으면 더러웠지 결코 덜하지는 않은 곳. 바닥에서 찌린내가 진동했다. 씨발 눈에 좀 띄게 갈기고 가던가. 잘못해서 밟으면 어쩌려고. 내가 욕을 시작하자 전정국이 또 눈을 동그랗게 치뜬다. 저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작은 토끼 같았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불쌍하다. 하기야 지금만 그랬던 게 아니고 예전부터 줄곧 그랬다. 내가 쟤를 주워서 우리 집으로 데려왔을 때부터 전정국은 상자 속에 버려져 오돌오돌 떨고 있던 새끼토끼 같은 존재였다. 가여우니까 내가 돌봐줘야 할, 사람이라기보다는 소동물 같은 개체.

 

우리가 늘 자리잡고 붙어먹던 전봇대 근처까지 오자 전정국은 내 옷깃을 끌어당기며 본격적으로 치대기 시작했다. 한쪽 다리를 올려 내 허리에 갖다붙이면서 하반신을 비벼댔다. 나는 전정국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뼈와 잔근육만 남아 비쩍 마른 다리에서 바지가 일자로 툭 떨어졌다. 너도 벗어, 형아, 너도 벗어. 전정국은 내 목덜미를 깨물며 속살거렸다. 빨리이. 쉿, 보채지 마. 나는 엉덩이에 꼭 맞게 달라붙는 그 애의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나마 통통한 엉덩이 살점을 쥐어뜯듯이 양 손 가득히 쥐자 얘가 우는 소리를 낸다. 이건 들어본 사람만 안다. 얼마나 야한지. 씨발. 미치겠다.

 

"서서 하면, 으응, 불편한데……."

"알아. 그래도 참아."

 

나 돌아버릴 거 같으니까. 되는 대로 내뱉었는데 앞니로 내 셔츠자락을 물던 전정국이 고개를 들고 까르르 웃는다. 가끔 저렇게 진짜 애기 같은 웃음소리가 나왔다. 그게 더 사람을 돌게 만드는 것을 다 알고 저런다. 전단지 테이프 자국으로 얼룩덜룩한 담벼락에 등을 바싹 기대고, 어떻게든 매달리려 아등바등 애쓰는 전정국의 속을 벌려 깊숙이 밀어넣었다. 무리하고 성급한 인터코스 때문에 어깨를 바투 끌어안은 손부터 팔뚝까지 한 차례 파드득 떤다. 흐으으. 죽는 소리도 낸다. 한쪽 다리를 내 허리에 걸고 나머지 한쪽 다리로 지탱하려니 키가 부족한지, 전정국은 제자리에서 깨금발하듯 콩콩 뛰었다. 발목에 걸려 있던 바지와 팬티는 벌써 저 구석으로 내팽개쳤다. 나는 전정국의 엉덩이 밑을 받치듯 해서 그 애를 반쯤 들어 안고 벽에다 밀어붙였다.

 

졸지에 표본대 위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눌러붙은 전정국은 끙끙대며 허리를 비틀었다. 교복 마이 안에 셔츠 대신 껴입은 반팔 티셔츠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유두를 찾아 앞니로 깨물었다. 벌써 함빡 땀냄새가 난다. 머리 위에서 전정국이 따갑다고 힝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손톱을 바짝 세워 내 등과 어깨를 연신 긁어댄다. 그렇게 깨물어도 젖 안 나와…… 벅차서 낑낑대는 주제에 할 말은 다 했다. 자꾸 뒤통수에서 걸리적거리는 티셔츠를 아예 김밥처럼 돌돌 말아 올렸다. 졸지에 바지와 팬티도 잃고 윗도리마저 반쯤 올라간 전정국은 뽀얀 살을 한 움큼 내놓은 채 불공평하다며 내 등짝을 찰싹 때렸다.

 

"아. 아파."

"형이 나만큼 아파? 아, 나는, 더 아프다구, 으응……."

"아프기만 해?"

 

나는 음담패설에는 재주가 없는 편이다. 아무리 몸을 갖다붙이고 살을 섞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야하게 생긴 전정국의 뒤를 벌려 밀어넣는 데 도가 텄으면서도 정작 야한 농담이나 저질드립 따위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말이 없어도 전정국은 알아서 곧잘 허리를 움직였다. 아니야, 좋아…… 간신히 한쪽 발끝으로 서 있는 주제에 스스로 접합부를 메우고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뜨끈한 속살이 어찌나 찰지게 맞붙는지 한 번 허리를 치댈 때마다 무언가 함께 딸려나오는 느낌이었다. 아래위로 부지런히 움직이자 전정국의 뒤통수가 자꾸 벽에 쿵쿵 부딪친다. 고개를 한껏 젖힌 그 애의 목울대가 꼴깍이며 흔들렸다.

 

"아, 응, 앗, 흐윽……."

"머리, 머리 좀."

 

귀 끝이 빨개진 전정국이 시키는 대로 고개를 약간 수그렸다. 나는 땀으로 축축해진 뒷목을 잡아 끌어당기고 전정국의 통통한 아랫입술을 물었다. 까실하던 입술이 침으로 범벅이 되어 말랑말랑했다. 얘는 온몸이 다 말랑말랑해. 하루종일 사방을 싸돌아다녀 뼈랑 근육 밖에 없으면서. 입 안으로 끙끙대는 전정국의 신음이 흐릿하게 번졌다. 한 톤 걸러듣는 그 신음을 모조리 삼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등 뒤로 무릎을 구부려 내 허리를 바짝 당기는 뽀얀 허벅지가 파르르 경련한다. 살갗 부딪치는 소리, 찰박거리며 고무장화로 물웅덩이 위를 내달리는 듯한 그 소리가 시끄러웠다. 채찍질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살 없이 근육만 야물딱지게 잡힌 전정국의 아랫배가 끈적한 액으로 미끌거리면서, 내 움직임에 치받혀 거의 반으로 접히다시피 구부러졌다.

 

으응, 하지 마. 슬며시 나머지 손을 등 뒤로 더듬어 접합부 쪽으로 옮기자 대번에 입을 떼고는 저렇게 말한다. 불평보다 앙탈에 훨씬 더 가까웠다. 가느다란 틈새 하나 없이 바짝 맞물린 구멍 근처를 더듬자 간지럽다며 억눌린 웃음소리를 냈다. 간지러, 형 나 간지러워. 이리저리 쓸리고 깨물린 젖꼭지는 빨갛고 통통하게 부어 있다. 아픈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키득거리며 웃음을 주체 못 하는 전정국을 더 바짝 끌어안고 엉덩이를 주물렀다. 내 어깨 위로 올라온 고개가 귓가에 대고 뭐라고 말을 한다. 절반이 토막난 신음이라서 다 알아먹지는 못하겠고, 지금 좋아 죽겠다는 것은 잘 알겠다.

 

정육점의 빨간 간판 불빛이 툭 켜진다. 내 머리 뒤에서 날아온 불빛이 전정국의 이마부터 벽 전체에 빨간 그림자를 드리웠다. 해가, 형, 해 졌나 봐. 헐떡이던 전정국이 말했다. 응, 알아. 아무리 욕정에 쫓겨 눈이 뒤집혔어도 나는 전정국이 하는 말이면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었다. 얘가 나한테만큼은 지나가는 말 한 마디라도 무시당하는 게 싫었다. 평생 아버지 같지도 않은 인간과 졸렬한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며 살아왔으니 나만큼은 얘 말을 꼭 들어주어야 했다. 형도 알아. 하도 꼭 끌어안아서 코앞까지 다가온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처박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전정국의 신음은 점점 더 꼬리가 길어졌다. 핸드폰 진동하듯 흔들리면서 박자를 맞추는 양 으으으응 하고 고개를 모로 젖힌다. 눈가도 귓가도 입술도 전부 새빨갛다.

 

오렌지색이었던 석양이 푸르스름한 밤의 어귀로 변하고 정육점의 뻘건 불빛이 점점 더 독해지는 가운데 우리는 차례로 사정했다. 희고 납작한 전정국의 배 위에 그 애가 싸질러 놓은 정액이 질척거린다. 바지만 내리고 있던 내 교복 윗도리도 엉망이었다. 나는 일부러 빼지 않고 깊숙이 박아넣은 채 짧게 떨었다. 힘이 빠지는 와중에도 죽기살기로 내게 매달리던 전정국은 내가 접합부 안에 사정하자 기어코 눈물을 찍었다. 형, 안에다 하면, 나중에 배 아프단 말야, 그러면서 땀으로 젖은 내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고 훌쩍훌쩍 운다. 나는 한껏 벌어진 다리 사이에서 물러나는 대신 엉망이 된 그 애의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벽에 여러 번 찧었는데 혹은 안 났을까. 느릿느릿 내 것을 빼자 후들거리는 전정국의 허벅지 사이로 묽은 액이 길게 흘러내렸다. 떼어놓고 얼굴 좀 보려고 해도 전정국은 자꾸 내 목에 코를 박으며 안겨든다.

 

"이러고 가면 나 아빠한테 죽어……."

 

목소리에도 눈물이 축축하게 배어 있다.

 

"내가 너 이대로 집에 보낸 적 있었어?"

 

희미하게 먼 발치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것도 같다. 그래도 밖이라고, 등 뒤에는 낡아빠지긴 했지만 어쨌든 멀쩡하게 고기를 잘라다 파는 정육점이 있고, 여기는 음습한 골목길이니, 나는 정국의 허벅지를 대충 닦아주고 바지와 속옷을 도로 입혔다. 혹시 누군가 보기 전에. 찜찜하다고 투덜대던 전정국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입을 꼭 다물었다. 아직 남아 있는 정액을 속옷으로 대충 문지르고 찝찝한 표정으로 바지를 꿰어 입는다. 나는 삐진 아이처럼 구는 전정국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등 뒤에서 껄껄거리는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한데 섞여 있었다. 정육점에 손님이 들었나 보다. 고기를 떼어 가서 누군가는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을까. 저녁 먹을 시간이니 대부분 그렇겠지. 제 시간에 끼니를 챙겨먹는다는 개념을 모르는 전정국은 그런 것쯤 상관없이 코를 훌쩍이며 바지 버클을 도로 잠근다. 나는 푹 젖은 뺨을 닦아주며 달랬다. 이것도 나의 마땅한 의무였다. 지금까지 수십 번을 똑같이 달래주고 보살펴 주고 챙겨줬는데도 전정국은 매번 지난 선례들이 다 없었던 것처럼 군다. 손톱을 똑똑 뜯으며 불안해하고 어쩔 줄을 몰라한다.

 

"우리 엄마 오늘 집에 없거든."

"응……."

"가서 씻고 밥 먹자."

 

따뜻하고, 맛있는 거 먹자. 손등으로 남은 눈물을 야무지게 닦아낸 전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나 깽판 쳤어. 아빠랑 그 아줌마 앞에서. 전정국이 털어놓았다. 이런 거 처음이야. 근데 생각보다 별로 어렵진 않더라. 빨갛게 부어오른 뺨과 마찬가지로 터져서 더 도톰해진 입술. 산발이 된 머리. 맞고 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매번 놀랐다. 쥐어터진 전정국의 얼굴을 볼 때마다. 세상 한 귀퉁이가 우드득 떨어져 나간 것처럼. 나와 붙어먹을 때에는 울어도 아버지에게 얻어터진 것쯤으로는 더 이상 울지 않는 전정국은 덤덤하게 말했다. 내가 식탁유리를 주먹으로 깼어. 나 버릴 거면 태어나게 하지도 말았어야지. 그 아줌마랑 결혼하는데 내가 뭐 칼 들고 뛰어들어간다고 협박하기라도 했나. 하필 아줌마가 보는 앞에서 쳐맞았어. 쪽팔려. 그리고 부어오른 뺨을 한 손으로 조심스레 감싸며 덧붙였다. 진짜 쪽팔려.

 

나는 양반다리를 하고 전정국의 뺨과 콧등의 생채기에 연고를 발랐다. 눈을 꼭 감고 얌전히 치료받는 전정국의 예쁜 얼굴을 구경하는 것은 덤이었다. 난 너처럼 생긴 사람 아니면 결혼하기 싫을 것 같은데. 마찬가지로 덤덤하게 말하자 전정국은 한쪽 입꼬리만 얇게 말아서 피식 웃었다. 나는 전정국의 가라앉은 기분을 다시 끌어올려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애가 좋아할 만한, 하지만 결코 이루어질 일은 없을 계획을 주절주절 떠들었다. 칼보다야 총이 낫지. 총만 있다면 결혼식장에 들고 쳐들어가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 바주카포는 좀, 너무 판타지려나. 영화에서도 보면 그러잖아. 아니면 너네 아버지가 신부랑 같이 돌아오는 길에 트랩을 설치해 놓는 거야. 부비트랩 같은 거. 어쨌든 너네 아버지가 호되게 당했으면 좋겠다는 거지. 그럼 뭘 설치해 놔도 괜찮지 않을까. 실제로 할 수는 없겠지만……

 

"아니야. 할 수 있을 것 같아."

 

뺨이 연고로 반들반들해진 전정국이 갑작스레 눈을 뜨며 내 말을 잘랐다. 뭘? 나는 순간 파악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되물었다. 대답 대신 손목시계를 보던 전정국은 속으로 무언가 잠시 셈을 했다. 그러더니 내 손목을 꼭 쥐었다. 형, 나랑 같이 고깃집 갈래? 전정국은 그 오래된 정육점을 고깃집이라고 불렀다. 지금? 내가 묻자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갑작스레 꼴리기라도 했나. 긴가민가했지만 나는 일단 옷을 주워입었다. 전정국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천장 구석 어디쯤에 시선을 두고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낡은 정육점이 있는 길목에 섹스 아니면 드나들 일이 별로 없었으므로 나는 자연스레 뒷골목 쪽으로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전정국이 내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우리는 빨간 불이 켜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정확히는 들어간 것이 아니라 가게 앞의 고기 진열대를 보며 꼭 무얼 사기라도 할 것처럼 서성거렸다. 안에서 큰 고깃덩어리를 꼬챙이에 꿰어놓고 칼로 토막내던 주인은 우리를 한 번 흘깃거리고는 무심하게 제 할 일만 했다. 설마 진열장을 깨고 생고기를 훔쳐가지는 않겠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도 속을 알 수 없는 전정국을 곁눈질했으나 그 애는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살핀다기보다 차라리 멍 때리는 것에 더 가까운 표정으로 진열장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 분쯤 그랬을까 가게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고기를 토막내던 주인이 칼을 도마에 내려놓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 때까지 어물쩡거리던 전정국이 돌연 물찬 제비처럼 뛰어들었다. 쏜살같이 정육점 주인의 작업대로 달려가 그가 방금 전까지 고기를 내리치던 큼직한 칼을 들고 다시 뛰쳐나왔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형, 뛰어! 고깃점이 너덜거리는 칼을 점퍼 안으로 어설프게 숨기며 전정국이 내 무릎 뒤를 툭 찼다. 우리는 사자에게 쫓기는 가젤처럼 뛰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세차게 뛰자 내 옆구리가 찢어지는 듯 아파 왔다. 전정국은 나보다 약간 더 앞서 뛰다가, 더 이상 가게 주인이 우리를 찾을 수 없을 만한 지점까지 왔을 때 비로소 다리에 힘을 풀고 숨을 골랐다. 어둑해진 하늘 아래에서 가로등 불빛을 삼킨 칼날이 야릇한 광채를 낸다.

 

"뭘 어쩌려고."

"이제 집에 가야지."

"……?"

"아빠 기다릴 거야."

 

신혼여행 같은 거 안 가거든. 두 사람 다 우리 집에 바로 온댔어. 오자마자 곧바로 섹스하지 않을까? 그 때 찌르면 완벽하지 않아? 섬뜩한 칼을 들고 그보다 더 섬뜩하게 중얼거리는 정국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심인지 잘 모르겠다. 아빠 이야기를 할 때의 전정국은 항상,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표정이 없어서. 칼을 흔들어 아직 묻어있는 고깃점을 털어낸 정국은 시무룩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내가 좋아하는 앙증맞은 표정이었다. 그래도 아줌마는 죽이지 말아야겠다. 좀 불쌍하기도 해, 왜냐하면 우리 아빠랑 결혼하면……인생 족치는 거잖아, 안 그래? 칼을 꼭 쥔 전정국의 오른손이 맥없이 아래로 내려간다.

 

저런 표정은 참 싫어한다, 닳고 닳은 표정. 하도 정을 맞아서 뾰족한 촉을 모두 잃어버린 돌멩이 같은 표정. 무기물을 흉내내는 사람은 언제나 소름끼친다. 하지만 전정국은 약간 예외다. 얘는 소름끼치는 게 아니라 그냥 가련하다. 안아주고 싶고 따뜻하게 꽁꽁 싸매주고 싶게 만든다. 실제로도 나는 한 번 그렇게 했었다. 아주 추웠던 겨울에 전정국이 여느 때처럼 얇게 입고 쫓겨났던 날, 집으로 달려가서 내 방에 있는 이불을 통째로 껴안고 갔다. 그리고 놀이터 벤치에 웅크려 있는 전정국을 그것으로 두텁게 감싸 주었다. 이불에 코끝까지 폭 파묻힌 전정국은 까만 머리꼭지만 내놓고 눈을 귀엽게 접었다. 우리 집으로 가는 동안 이불이 질질 끌려 등 뒤에 그림자 같은 자국이 생겼다. 이제 전정국은 그런 것으로는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너무 커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해줄게."

 

그러니 내 위로도 자연히 이런 식으로,

 

"너보다는 내가 더 낫지 않을까."

 

변질되어야, 한다.

 

"너는 범인으로 의심받기 너무 쉬우니까……."

"……."

"아예 남인 내가 하는 게 낫지."

 

다만 이제는 진짜로 그리 해주지는 못하고, 말뿐이라서, 그래서 전정국은 까만 시선을 내게 씌우고 아무 대꾸가 없다. 오랫동안. 상처투성이인 저 눈 좀 봐. 속이 다 썩었어.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인형처럼 서 있는 전정국을 꼭 껴안았다. 오늘은 땀냄새가 나지 않는 마른 몸. 사람 죽이는 계획을 이야기해도 불쌍하고 예쁜 애. 언젠가 정말 방전된 것처럼 재기불능이 되어도 내가 기어코 살려내야 할 존재. 나에게 의무감을 가르쳐 준 장본인을 나는 꼭 끌어안고 날개뼈가 도드라지는 등을 토닥인다. 한참을 안겨만 있던 전정국은 슬그머니 내 어깨 위로 고개를 떨어뜨린다.

 

칼을 건네받았다. 비닐봉지 같은 것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내 가디건 속으로 대충 숨겼다. 해가 져서 천만다행이었다. 한 손을 품 안으로 넣고 걷는 꼴은 누가 봐도 수상쩍을 모습이었다. 가능하면 전정국을 우리 집으로 데려가 재우고 싶었으나 엄마의 눈치가 보였다. 엄마는 전정국이 점점 더 커가면서 내가 얘랑 어울리는 것을 대놓고 못마땅해했다. 어찌되었든 넌 대학을 갈 거잖니. 하지만 정국이는 아니잖아? 내게 그런 말까지 한 적도 있었다. 나는 엄마를 이해한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고 아껴서, 걱정해서 그런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얘랑 같이 다닌다고 해서 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아니잖아. 얘한테는 이게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인데. 오늘 전정국의 집에는 한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이 그 애의 영원한 증발을 기원하며 진치고 앉아 있을 것이다.

 

부엌과 거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는지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전정국이 가장 좋아하는 냄새였다. 찌개인가 봐. 내가 전정국에게 소곤거릴 때 부엌에서 엄마가 외쳤다. 태형이 왔니? 네. 얼른 씻고 저녁 먹자. 나는 부리나케 신발을 벗고 전정국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가디건을 벗고 고기 써는 칼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런 일이야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전정국은 알아서 기척을 죽이고 침대맡에 얌전히 서 있었다. 괜찮아, 일단 씻고 옷부터 좀 갈아입자. 엄마한테는 적당히 둘러대서 하룻밤쯤 모면할 생각이었다. 전정국은 늘 빌려주던 잠옷용 티셔츠를 건네는 나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다. 오늘 우리가 무슨 일을 계획했는지 다 까먹을 만큼 상냥하고 다정한 미소였다.

 

옷을 갈아입으라고 정국을 방에 두고 먼저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수를 하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 인간이 진짜로 전정국을 버리고 싶어한다면, 내일 집으로 돌려보내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겠지. 그럼 어디서 데리고 있어야 할까. 근처의 모텔이라도 보내야 하나. 머리가 복잡했다. 엄마한테 부탁해 보고, 정 안 된다면, 나는 전정국과 함께 값싼 여관방에서라도 며칠씩 붙어지낼 용의가 있었다. 물기를 닦으며 밖으로 나오는데 때맞추어 엄마도 부엌에서 나왔다. 나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너 나간 거 아니었니?"

"네?"

"방금 문 닫는 소리가 들리던데."

 

아닌데, 나는…… 대답하다 말고 나는 깨달았다.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꼭 닫혀 있는 문을 여니 그리 넓지도 않은 내 방은 벌써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다. 없다. 방금 전까지 침대 곁에 서서 조용히 웃고만 있던 전정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야, 이게……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제발, 나는 미친 듯이 빈 방안을 둘러보았다. 제발. 그리고 책상 위를 향한다. 아무것도 없다. 정육점에서 훔쳐온 칼이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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