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태어나서 생전 처음으로 클럽에 갔다. 음 그것도 처음엔 별로 가고픈 생각이 없었는데 취기에 그랬는지 아니면 카톡 한 통 없는 개같은 애인새끼 때문에 홧김에 그런 건지 영 모르겠지만. 아무튼 소주 두 병을 미리 목구멍으로 탈탈 털어넣고 갔다. 사실 김태형이 죽고 못 사는 그 환락이라는 게 대체 얼마나 뽕 빠지는 건가 싶어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결과는 솔직히 말하자면, 좀 실패에 가까웠다. 아니 까놓고 얘기해서 존나 재미없었다. 하필 같이 놀던 친구들 중 두 명이 스트레이트였던 탓에 맨 처음에는 이태원에서 가장 핫하다는 라운지 클럽에 반 강제로 끌려갔다. 말대로 예쁜 여자애들은 많았다. 굳이 이렇게 좁고 어둡고 쿵짝거리는 곳으로 오지 않아도 예쁜 여자들은 길거리에 쌔고쌨지만, 그래 예쁜 애들은 많았다. 정국이 아쉽게도 본투비 게이였다는 슬픈 사실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딱 봐도 내공이 빠삭할 듯한 누님들이 섹시하게 눈웃음을 치는데 볼따구부터 얼어버린 듯 입꼬리가 도무지 올라가질 않았다. 향수 냄새가 풀풀 났다. 하도 끼리끼리 바짝 붙어 있으니 누구 냄새인지 분간이 안 갔다. 정신도 없고, 맘에 차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다가오는 여자들을 무작정 밀어내기도 뭣해서 정국은 어정쩡하게 두 손을 등 뒤로 감추고 있었다. 누굴 만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보다 못한 나머지 친구―그는 헤테로와 게이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바이였다―가 정국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게이클럽으로 데리고 갔다. 차라리 그게 훨씬 나았다. 남자들은 맘에 들지 않으면 거절하기도 쉬웠고 정색하거나 노려보는 것도 편했다. 하지만 코뚜레 꿰인 소처럼 게이클럽 안으로 들어선 지 삼십 분만에 열두 명의 남자를 물리치고 나서, 정국은 오늘 날 잘못 잡았다고 후회했다.
진짜, 잘생긴 애 1도 없다. 아니 없는 건 아닌데. 정정하겠다. 김태형만큼 삐까번쩍하게 생긴 놈은 정녕 이 바닥엔 없는 모양이다. 하기야 그 얼굴이 길바닥에 널릴 정도라면 대한민국은 벌써 인류의 역사를 새로 썼을 것이다.
씨발 진짜 인정하긴 싫은데. 그 새끼 잘생기긴 했으니까. 아니 잘생겼다는 말로도 부족하니까. 허구한 날 보는 게 그런 얼굴이니 정국의 눈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딱 그 수준만큼 치솟았다. 김태형 지 말로는 자기 성정체성만 깨닫지 않았더라도 시골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는 게 꿈이었다는데, 정국은 아직도 그 말을 지나가는 개소리 쯤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 얼굴에 농부라면 벌써 귀농할 여인네들이 전국 팔도에서 몇십 만 명은 찍고도 남았겠다. 아니 김태형은 게이니까 남자들이 몰려오려나.
여차하면 핸드폰을 아예 꺼 버릴 각오로 나왔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던 게 1차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던 도중 배터리가 맛이 가 버렸다. 거하게 취한 친구놈이 소주를 들이부었기 때문이었다. 정국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기대는 안 하는 게 낫겠지만, 혹여 밤새도록 집을 비운 자신을 알아챈다면 김태형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긴 했다. 물론 연락이 온다고 해도 첫 차 뜰 때쯤이나 아침으로 해장국을 먹고 있을 때겠지만. 그 새낀 불금이면 엉덩이가 들썩거려서 도무지 집에 붙어 있을 줄을 모르는 놈이니까 말이다.
태형의 하는 짓은 몹시 괘씸했으나, 그의 얼굴만큼은 가히 모든 지랄과 과오의 면죄부였기 때문에 정국은 태형보다 훨씬 못생긴 것들이 자신에게 들러붙는 상황이 심히 못마땅했다. 앞뒤로 두 명이 샌드위치처럼 철썩 붙어서 아랫도리를 부벼대자 욕지기가 콧구멍까지 치솟았다. 아 시발. 여기까지 자신을 끌고 온 친구놈을 찾았지만, 정육점 같은 조명과 때아닌 드라이아이스가 윤무를 추는 통에 그렇잖아도 복닥거리는 틈에서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좀, 놔라. 힘으로 둘을 떼어내고 재빨리 달아나려다 어떤 덩치의 무지막지한 엉덩이에 떠밀려 소파에 주저앉았다. 정정. 주저앉은 게 아니라 아예 쓰러지는 바람에 누군가의 허벅지에 뒤통수를 퍽 찧었다. 꽤 아팠다. 말랐는데 살이 아니라 근육이 땅땅하게 들어찬 허벅지였다.
아 진짜 날 잘못 잡았다…… 정국은 속으로 수십 번 시발을 외치며 질끈 감았던 눈을 겨우겨우 떴다. 허벅지 주인의 얼굴이 아주 정직한 각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만한 위치에서는 저 정도의 갸름함이 나오기 힘들 텐데, 아무튼 엄청나게 예리한 턱선과 달리 부드러운 시선이 쏟아졌다. 괜찮아요? 일어나지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는 정국에게 근육덩어리 허벅지의 주인이 상냥하게 물었다. 얇은 듯하면서도 바람이 찬 듯, 긁히는 듯, 매우 특이한 목소리였다.
"야."
"……."
"야!"
그 허벅지 주인의 얼굴이 어땠더라. 벌써 꿈결처럼 어렴풋한 간밤의 기억을 더듬는데 김태형이 산통을 깬다. 못마땅한 것도 못마땅한 거였지만 어쩐지 그보다는 비웃음이 가득한 말투였다. 그게 정국을 욱하게 만들었다. 화딱 고개를 쳐들자 태형이 새까만 가죽재킷을 훌훌 벗어 침대 위로 집어던지고 있었다. 방금 집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도대체 언제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 태형이 움직일 때마다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아주 독하게 풍겨 왔다. 뺨에는 어떤 변태 같은 놈이―태형은 게이였으므로 '년'일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부벼댔는지 모를 거대한 입술자국이 꼴사납게 번진 채였고 커다란 눈은 약간 풀려 있었다.
"너 간밤에 클럽 갔다며?"
"……누가 그래?"
"석진이 형이."
너 어제 이태원에서 삐대는 거 다 봤다던데. 역시 유유상종이라고, 김태형만큼이나 이태원 죽돌이로 유명한 석진의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며 정국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 형은 또 나를 언제 봤대. 밤을 꼴딱 지샌 여파가 생각보다 컸다. 목과 어깻죽지 사이에 돌이라도 끼인 듯 뻐근했고 눈도 침침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입까지 헤 벌리고 정신없이 졸기만 했었다. 딱 일주일만 놀아도 과로사할 것 같은데 쟤는 대체 이런 걸 어떻게 견디지. 때꾼한 눈을 비비며 정국은 침대가에 걸터앉은 자세를 약간 고쳤다.
"핸드폰도 꺼 놓고 어딜 싸돌아다니나 했네. 꼴에 클럽두 갔냐? 누구랑?"
모 아니면 도. 짜증을 내거나 아니면 코빼기도 신경 안 쓰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빈정이 좀 상한 모양이다.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 까라진 태형의 말투를 듣고 있자니. 아무래도.
아무리 그래도 너만 할까
* 뷔국
기둥서방도 아니고, 어떻게 명색만 애인일 수가 있나. 제대로 데이트를 하기를 했어 기념일을 챙기길 했어, 맨날 눈만 마주치면 때와 장소 불문의 섹스나 하고. 내가 이런 관계를 바란 건 절대로 아닌데. 어디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지 멀쩡하다 못해, 아니 멀쩡한 수준이 아니라 솔직히 누가 봐도 잘나빠진 게 나인데. 정국은 생각할수록 기가 찬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 봐도 지금까지 쭉 흘러온 상황은 김태형에게 단단히 코가 꿰인 채 기둥서방 노릇을 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면 숨쉬고 말도 하고 반응도 제깍제깍 하는 섹스돌. 김태형은 얼굴 값 한다고 밖으로 좆 빠지게 싸돌아다녔고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낮, 길게 잡으면 일요일까지도, 집에서 얼굴을 보기가 참 힘들었다. 처음 소개받은 술자리에서 석진이 물끄러미 정국을 들여다보다가, 태형이 화장실 간 틈을 타 혀를 쯧쯧 차며 말한 데에는 다 까닭이 있었다. 아니 어쩌자고 김태형한테 낚였어요? 쟤 어떤 놈인지 모르니까 사귀는 거죠?
원래 그런 놈인 줄 알았더라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었겠냐.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태형은 연기를 정말 잘 했다. '그런' 연기가 아니라, 철저하게 전정국을 꼬시기 위한 작업용 연기. 저걸 내가 잡아먹어야겠다 마음먹은 순간 먹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집요하게 달라붙는 김태형의 거미줄 같은 마수.
학교 축제에 나타난 인물이니 당연히 같은 학교 학생이거나, 아니면 인근의 다른 대학에 다니는 줄로만 알았다. 같은 과는 절대로 아닐 거라고 처음부터 확신했다. 저토록 화려한 얼굴을, 아무리 갓 복학한 자신이라도 그 동안 한 번도 못 봤을 리가 없다고, 정국은 생각했다. 그 때 김태형의 위엄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그 바글거리는 개미떼 같은 인파 속에서 모든 여자들이 전부 김태형이 지나가는 방향을 따라 넋 나간 듯 고개를 돌렸다. 심지어 남자들도 여럿 그랬다. 머리색깔은 대체 연예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소화해 낼까 싶을 만큼 어마어마한 주홍색이었는데 옷차림만큼은 얌전했다. 까만 셔츠에 까만 슬랙스. 핏도 끔찍하게 좋았다. 그렇게 기깔나는 모습으로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넣은 채 정국의 과 주점까지 찾아왔다.
스무 살이 끝나자마자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입대하고, 이제 막 제대하여 졸지에 수십 명의 후배를 거느리게 된 복학생 정국은 아무래도 토끼 머리띠를 쓰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엔 짬밥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과에서 가장 손꼽히는 얼굴 마담이었으니 중대한 역할이 떨어졌다. 주점 안에서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다가 이따금 입구에서 기웃거리는 여자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 주기. 게이한테는 너무 잔인한 처사 아닌가. 정국은 속으로 툴툴거렸지만, 얼마 뒤 낮은 천막 지붕을 젖히고 주점 안을 들여다보는 태형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불평을 삽시간에 다 까먹고 말았다. 잠깐, 요즘엔 아이돌도 주점엘 다 오나?
아이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들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했지 누구 하나 나서서 싸인해 달라 이런 소리는 안 했으니. 눈이 마주쳤으면 곧바로 떨어져 나가야 할 시선이 십 초쯤 진득하게 정국을 붙들었다. 핑크색 스파크가 마구 튀는 것 같았다. 정국은 표정관리도 못한 채 눈이 튀어나오게 잘생긴 얼굴을 멍청히 마주보기만 했다. 이윽고 아이돌 뺨치는 그 주홍색 머리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가장 구석진 자리에 홀로 앉아서 파전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에서 여즉 눈을 못 떼는 정국을 향해 분명하게 손짓을 했다. 큰 손바닥으로 앞자리의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를 탁탁 치면서. 여기 좀 와서 앉아 봐요.
'저, 저 아세요?'
'모르는데요.'
'…….'
'잘생겨서 와 보라고 했죠. 이 학교 학생이에요? 여기 무슨 과지?'
산업경영이요…… 엉겁결에 주홍색 머리와 마주앉아 술잔까지 기울이게 된 정국은 말끝을 흐렸다. 사방에서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이 그의 등과 뒤통수를 푹푹 찔렀다. 아아 산업경영. 별로 귀담아듣지도 않는 듯 고개를 주억이던 남자는 몇 살이에요? 군대 갔다 왔어요? 술 잘 마셔요? 여기서 언제까지 일해요? 와 같이 시덥잖고도 작업이 분명한 질문을 줄줄 던져대다가, 파전 접시가 바닥을 보일 때쯤 일어났다. 도합 세 병을 시켰는데 대부분이 정국의 목구멍으로 들어간 후였다. 술을 못 마신다며 시익 웃는 그의 얼굴이 정국의 마음을 흔들다 못해 아주 떡 주무르듯이 쥐어팼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빈 속을 소주로 채운 정국만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랐다.
'나랑 같이 가요.'
'어, 어딜요?'
'아무 데나. 좀 조용한 곳. 나 이 학교 지리 모르거든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연기는 개뿔. 그게 무슨 연기야. 그냥 사람 꼬시는 데 능통한 새끼가 딱 봐도 게이인데다 아다이기까지 한 놈 홀랑 따먹고 버리려는 공사였겠지. 하지만 남중남고 테크에 갓 제대하여 청정구역이나 다름없는 정국이 그 따위를 눈치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눈앞에서 살랑살랑 웃는 얼굴은 미친 듯이 취향이었다. 비록 짧은 인생이었지만 게이로 살면서 한 번도 저런 미모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국은 그냥 그가 가자는 대로 따라갔다. 나중에 듣기를 주점에 남은 사람들은 그가 정국의 고등학교 동창쯤 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오라는 대로 오고, 가자는 대로 군말 없이 따라가길래 잘 아는 사이인 줄 알았다고.
그 뒤는. 뭐.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이, 그냥. 정국은 지금도 그 날만 떠올리면 발가락 끝에서부터 차오르는 쪽팔림에 뺨을 쥐어짜며 속으로 비명을 지른다. 씨팔 나는 김태형 같은 후로게이한테 초장부터 아다 티 줄줄 낸 것도 쪽팔린데, 심지어 그 자리에서 동정까지 따였어. 장소는 무려 학교 강의실. 게다가 그 강의실은 멋도 모르고 슬슬 술에 취해가던 정국이, 조용한 장소를 알려달라는 태형의 주문에 따라 제 발로 안내한 곳이었다. 여기는 사람 없어요? 더 조용한 데 없나? 경비 아저씨 안 와요? 문 안 잠겼을까? 꼬치꼬치 캐묻더니, 학교 축제일이라면 누구도 들어올 일 없는 홍보관의 빈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정국을 책상 위로 넘어뜨렸다.
그 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아랫배가 다 욱신욱신 아프다. 하도 급하게 일을 치르느라 태형이 정국을 책상에 엎어놓고 뒤에서 있는 힘을 다해 내리눌렀기 때문이다. 책상 끄트머리에 짓눌린 아랫배가 내장까지 뭉개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뒤에서는 존나 두꺼운 불방망이 같은 게 정신도 못 차리게 쑤셔대고. 나 진짜로 처음이었는데. 개새끼가.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내려버리는 태형의 손목을 붙들고 살살 해 달라며 애처로운 부탁을 해봤으나 씨알배기도 안 먹혔다. 네가 초짜라고? 네가? 구라치지 말라고 낄낄대던 태형은 아프다고 책상에 이마를 처박으며 우는 정국을 보고서야 쳐웃던 것을 멈추었다. 대신 손가락을 세 개나 집어넣더니 이렇게 잘 먹는 아다는 처음 봤다고 좋아라 하며 정국의 맨 등에 머리칼을 부볐다. 엉덩이부터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르려는 정국의 입에 벗겨낸 바지자락을 꼭꼭 물려주기까지 했다. 그 때 죽여 버릴걸.
"누구랑 갔냐니까? 말 씹어?"
큼직한 손바닥 두 개가 양 볼을 찰싹 때리고 짓누른다. 아, 이 새끼 진짜 패고 싶다…… 정국은 몽롱하게 생각했다. 추억팔이 할 때가 아니긴 했다. 분위기가 꽤 험악했다. 팔찌와 시계도 빼어 협탁 위에 올려둔 김태형이 헐렁한 티셔츠 소매를 둥둥 걷어붙인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지가 쏘다니는 건 생각도 안 하고 남이 한 번 간 것 가지고 죽일 듯이 째려보는 꼴 좀 봐.
"친구들이랑 갔는데."
"친구 누구."
"알아서 뭐 하게."
"뭐?"
"나 원나잇도 했다?"
혼곤한 잠기운, 술기운, 오랫동안 쌓여온 억울함, 빈정상한 짜증에 힘입어 될 대로 되라고 내뱉은 한 마디에 태형의 눈썹이 치켜올라간 그대로 딱 굳어졌다. 이제 저런 것조차 밉고 뻔뻔해 보인다.
네가 정상적인 애인 노릇만 했더라면 나도 이렇게 막나가진 않았지. 노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정국은 그런 것, 그러니까 눈 시퍼렇게 뜬 애인을 두고 아무랑이나 자고 다니는 난봉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태형은 그런 짓을 했다. 그것도 즐겨서. 이 새끼가 날 버려두고 딴 놈 뒤나 뚫고 다닌다는 것을 안 게 언제쯤이었는지, 벌써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아마 애인 타이틀을 붙인 지 한 달하고도 반쯤 지난 후부턴가 그랬을 거다. 그 한 달 반 동안에도 과연 김태형이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긴 했을지, 정국은 슬프게도 아주 확신할 수가 없다.
아니 언제는 처음인 티가 팍팍 나서 좋다며? 지금 생각해 보니 존나 쓰레기 같은 발언이긴 했지만, 아무튼 태형은 연애 초기에 그런 말을 자주 했었다. 너 얼굴은 진심 내가 본 사람들 중에 탑 급인데, 존나 제일 예쁜데, 여기 구멍은 안 그래서 좋아, 진짜 어떻게 이 얼굴로 내가 처음이지? 너 그냥 국보급 문화재 해라, 헛소리를 하면서 날이면 날마다 물고빨고핥고 아주 잡아잡수실 것처럼 굴었다. 게이 연애가 처음이었던 정국은 그저 태형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닐 뿐이었다. 이러는 게 병신 같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태형이 흐, 하고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얼굴로 웃을 때마다 따뜻한 물 속의 물감처럼 설설 녹아 버렸다. 예쁘다는 소리를 매일 다양한 방법으로 질리지도 않도록 해주고 꿀 떨어지는 눈으로 쳐다보는데 안 넘어갈 수 있을 리가.
그래놓고 뒤에서는 호박씨를 거하게 깠단 말이다. 그걸 처음 잡아냈던 날엔 분명 자신에게 조상신이 강림한 게 틀림없었다. 왜 그렇게 촉이 좋았던가. 오랜만에 치킨이 먹고 싶어서 두 마리를 사다 놓고 기다렸는데 김태형이 돌아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 전까지는 술자리마다 항상 정국을 대동해서 나갔는데 그 날은 아니었다. 누구랑 어디 갔는지조차 몰랐다. 핸드폰도 죽어 있었다. 새벽 한 시가 넘어갈 때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처음에는 걱정을 했는데, 퍼뜩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직감이란 이렇게나 무서운 법이다.
핸드폰을 뒤져서 태형이 자신과 가장 친하게 지내는 형이라고 소개시켜 줬던 석진의 번호를 찾아냈다. 석진은 다행스럽게도 제때 전화를 받아 주었다. 쿵쿵거리는 요란스럽고 수상쩍은 사운드를 배경으로 깔고서. 형 저 정국인데요. 누군지 확인조차 않고 전화를 받았는지 석진의 목소리에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좀 덜 시끄러운 곳을 찾는지 왕왕대는 소음이 고막을 괴롭히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사그라들었다.
'응 정국아. 왜?'
'김태형 거기 있죠?'
'어? 아닌데.'
'뻥치지 마요. 형이 저한테 거짓말을 하시면 어떡해요.'
'…….'
'김태형 거기 있죠? 있죠?'
이게 무슨 상황인지 벌써 어느 정도 눈치를 깐 정국은 서러워졌다. 석진은 정국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약했다. 아닌 걸 맞다고 우기는 못된 거짓말도 잘 못 했다. 할증 붙은 택시를 타고 석진이 가르쳐 준 곳으로 쫓아갔더니 온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요란하게 음악이 흘러나오는 클럽 입구에서 김태형이 궁시렁대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주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 옆구리를 주먹으로 한 대 때리던 석진은 태형보다 먼저 정국을 발견하고 입을 싹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황급히 클럽 안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태형은 얻어맞은 옆구리를 문지르며 툴툴대다가 뒤늦게 정국을 보고 시익 웃었다. 평소의 순한 웃음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아이고 우리 정국이.'
형아 보고 싶어서 왔어? 뻔뻔스레 두 팔을 벌리며 웃는 태형의 목덜미, 꼼꼼하게도 새겨진 입술자국들이 정국의 꼭지를 비틀었다. 맥스를 찍었던 그 날의 분노라면 분명 태형을 쥐포처럼 만들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내심 걱정이 되었는지 다시 밖으로 나온 석진이 부랴부랴 정국을 뜯어말리는 바람에 그렇게는 못 했다. 당장 바닥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고, 눈앞의 김태형은 지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쟤는 지랄하는 것도 예쁘다면서 실실 쳐웃고만 있으니. 넌 내 손에 진즉 뒤지지 않은 걸 감사히 여겨라.
"야. 방금 뭐라고?"
다시 현실. 술을 많이 먹은 탓인지 자꾸 생각이 딴 데로 샌다. 그 게이클럽에서도 독한 양주를 여러 잔 얻어먹은 게 화근이었다. 근육덩어리 허벅지의 남자가 자꾸 정국에게 술을 먹였다. 얼굴이 기억 날 듯 말 듯. 내내 희미하게 웃고 있던 얼굴. 턱선이 아주 갸름하고 눈웃음이 장난 아니었는데. 화다닥 일어나는 정국을 붙잡아 앉히고 잔을 건네면서 끊임없이 뭔가를 물어봤었다. 김태형의 수법이랑 좀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샐샐 웃던 남자의 얼굴에 찬 물을 얻어맞은 듯 식어버린 눈앞의 태형이 겹쳐진다.
"나 원나잇도 했다고. 존나 잘하더라 너보다 잘해……키는 좀 작았는데 암튼 하는 건 내 취향이더라."
손등에 남아 있는 클럽 입장용 도장을 보여주려고 길게 내려온 니트 소매를 걷어올리는데 이제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멍청하게 서 있던 태형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거짓말 하지 마 미친년아!"
"아냐 진짜야. 보여줄까 봐봐……."
정국은 진짜로 윗도리를 까려고 바지 허리춤에 집어넣었던 니트자락을 슬슬 빼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관뒀다. 태형이 갑자기 협탁 위에 있던 탁상시계를 냅다 집어던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함께 올려두었던 손목시계와 팔찌가 어디론가 날아가서 자취를 감추었다. 벙찐 정국은 구석에 애처로이 처박힌 시계를 한 번 보고, 눈앞에서 제 분노를 못 참아서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기 시작하는 태형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지랄이지? 하지만 여태껏 본 적이 없는 표정으로 변한 태형은 숫제 닥치는 대로 방 안의 물건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가 코드째 뽑혀 날아갔다.
"씨발년아 씨발년아……."
주문처럼 음산하게 중얼거리는데 그새 눈이 맛이 갔다. 별로 넓지도 않은 방 안을 정신 사납게 이리저리 쏘다닌다. 태형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물건이 조각나고 까지고 부서지느라 이내 발치에 잔해가 수북해졌다. 아침마다 자리끼처럼 떠 놓고 마시는 물컵도 집어던지고 스킨과 로션병도 집어던지고 심지어 생일선물로 받았다던 한정판 피규어까지 박살을 냈다. 발에 채여서 두 번씩 부순 것도 있었다. 데굴데굴 굴러와 발끝에 닿는 피규어의 머리통을 툭 차 버린 정국은 태연스레 뺨을 삭삭 긁었다.
"왜 이래. 니가 잘하던 거잖아. 니가 하는 건 괜찮고 내가 하는 건 안 되냐? 쓰레기네 이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형이 갑자기 우뚝 선 채로 울음을 터트렸다. 볼을 문지르던 정국의 손가락이 삐끗 미끄러졌다. 씨발년아 닥쳐! 닥쳐 나쁜년아 하고 쌍욕을 하며 온 집안이 떠나가라 꺼이꺼이 울던 태형이 갑자기 정국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정국은 어깨를 떠미는 태형의 손에 밀려 뒤로 쓰러졌다. 침대에 드러누운 채 멀뚱멀뚱 올려다보는 정국의 뺨과 콧등 위로 아예 그를 깔고 앉은 태형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천하의 김태형이 이렇게 질질 짜는 일도 다 있다니. 김석진도 못 봤을 희귀한 광경이었다.
"야 씨발 진짜 잤어? 진짜 구라 안 치고 잤어?"
"아니 그럼 진짜지 이거 갖고 거짓말 해?"
식식거리는 태형의 뜨거운 숨이 얼굴을 간지럽힌다. 비켜, 무거워. 인상을 팍삭 찌그러뜨린 정국이 밀어내도 꿈쩍도 안 하고 울던 태형이 이번에는 베개를 냅다 집어던졌다. 어린애처럼 섦게 윽윽거리다가 말도 안 되는 악을 쓴다. 야 씨발 물어내 그 좆같은 새끼 불러와 그거 다 무르라고 그래!! 죽여버릴 거야 씨발년아 왜 그랬어 구라치지 마 아니라고 해!!! 죽여버릴 거라 해놓고 정작 정국에게는 손가락 하나 못 댄 채 침대 위에 떨어진 화장품 병 파편을 집어서 바닥으로 처박았다. 정국은 일어나는 것을 포기한 채 태형이 울며불며 전에 없는 지랄을 하는 것을 구경했다. 쭉 둘러보니 아까 집어던진 스탠드 때문에 벽지도 찢어지고 화장대 거울도 산산조각이 났다. 굉장했다. 굉장하다는 말을 이런 데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굉장했다. 그래봤자 여긴 내 집도 아니고 자기 집인데 뭘 쳐부수든 지만 손해 아닌가…… 이제 좀 딱하다는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으려니 온몸을 들썩이며 흐느끼던 태형이 비틀비틀 물러난다.
정국은 발딱 일어나서 자신을 제외하면 멀쩡한 게 없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 때까지 날뛰던 태형은 더 이상 부술 만한 걸 못 찾았는지 창가로 다가가서 창문을 제꺽 열었다. 찬 바람이 휙 쏟아져 들어왔다. 얼씨구.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창틀에 기어올라가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것처럼 자세를 잡는 뒷모습을 팔짱 끼고 바라보던 정국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야 근데 이거 뻥이야."
"……."
"구라라고."
눈물콧물로 엉망인 얼굴에 너갱이까지 나간 표정으로 태형이 돌아보았다. 와 김태형이 처음으로 존나 못생겨 보여. 정국은 혀를 찼다.
"너 어디까지 지랄하나 싶어서 뻥 좀 쳐봤는데 진짜 장난 아니다."
"……."
"뛰어내리게?"
침묵. 세상에서 가장 어벙한 표정으로 정국을 바라보던 태형이 대답도 못한 채 샷시 위로 무릎을 꿇었다. 정국이 앉아 있는 곳에서도 쿵 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피멍 들겠네. 아플 것 같긴 한데 지금 당장은 걱정되기보다 그저 꼬시다는 심정이었다. 고통도 못 느끼겠는지 아니면 상황 파악에 정신이 없는 건지 태형은 창틀에 웅크린 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렇게 물었다.
"……진짜 뻥이야?"
여차하면 또 엉엉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과 팅팅 부은 눈두덩, 벌개진 눈알이 볼 만했다. 대답도 않고 마주 쳐다보기만 했더니 태형은 비슬비슬 기다시피 창틀에서 내려왔다. 좀비 같았다. 추워, 창문 닫아. 정국의 명령에 군소리 없이 고분고분 창문을 닫더니 개판이 된 방 안을 멍하니 돌아보고, 한동안 또 뭘 생각하는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서 있다. 이렇게 엄청난 반응이 나올 줄 알았더라면 어디 카메라라도 설치해 놓을 걸 그랬다. 내심 아쉬워진 정국이 입맛을 다시는데 별안간 성큼 다가온 태형이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숨막히도록 꼭 끌어안았다. 체중에 밀려 또 뒤로 쓰러진 정국은 비키라고 왈칵 짜증을 내려다가, 목덜미에 파묻힌 태형의 얼굴에서 쿨쩍대는 소리가 흘러나와 그냥 참기로 했다.
"진짜 죽여버릴 거야……."
"……."
"진짜 죽일 거야……."
"너 존나 웃긴다. 넌 아무랑 막 자고 다니면서 나는 왜 하면 안 돼?"
"몰라 난 딴 새끼들이랑 나눠먹는 거 싫어. 그거 못해. 아 진짜 존나 싫어……그런 거 하지 마……."
정말 끝까지 지랄한다. 눈물콧물 다 짜면서 할 말은 하고야 마는 태형에게 기가 찬 정국은 코앞에서 살랑거리는 노란 머리꼭지를 노려보았다. 태형이 코를 들이마실 때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꼼질꼼질 움직였다. 이걸 귀엽다고 해야 돼 말아야 돼. 온 물건을 쳐부수고 다니느라 기력이 딸렸는지 한동안 품에 얼굴을 박고 훌쩍이기만 하는 태형을 얌전히 기다려 주던 정국은, 술기운이 달아나며 점점 선명해지는 게이클럽의 그 남자를 문득 떠올렸다. 솔직히 섹스는 안 했고, 번호는 줬다. 눈웃음이랑 목소리랑 작은 체구에 비해 단단해 보이는 몸매가 마음에 들어서 키스도 했다. 그 남자는 야살스러운 눈웃음만큼이나 키스도 정말 끝내주게 잘했었다. 이걸 실토하면 김태형은 저 깨진 거울에 자기 머리통을 처박을지도 모르니까 참아야겠다.
"……지금 뭐해?"
딴 생각을 잠깐 하고 있었더니 그새 목덜미에 축축하고 뜨거운 게 닿는다. 화들짝 놀란 정국은 태형의 등을 한 대 퍽 소리나게 내리쳤다. 빨개지고 퉁퉁 부은 눈으로 슬며시 눈치를 살핀 태형이 대답 대신 꾸물꾸물 정국의 청바지 허리춤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나마 이걸 귀엽다고 생각한 내가 병신이다. 정국은 얄밉기 짝이 없는 금발 뒤통수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씨발 너 한 번만 더 밖에서 좆 휘두르고 다니면 그거 뜯어버릴 거야!"
"너무해."
너무하긴 지랄. 아무리 그래도 너만 하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