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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 스트리트 上

 

  "사장님은 왜 그렇게 장사에 욕심이 없으세요?"

 

 

  이건 무슨 개소리여. 브레이크 타임을 맞아 잠시 주방 밖으로 나온 윤기가 때 아닌 볼멘소리에 눈썹을 구겼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대걸레를 쥐고 있던 지민이 제가 먼저 화두를 던져 놓고 슬쩍 눈치를 살핀다. 침을 꼴깍 넘기는 목울대의 꿈틀거림이 쇼케이스 너머에서도 다 보였다. 쿠, 쿠폰 말예요! 손님들이 여기 스탬프나 쿠폰제 없냐구 물어보는 게 대체 몇 번짼 줄 아세요? 도장 모아가지고 공짜 케이크 먹는 재미가 있어야 손님들도 더 많이 올 거 아녜요! 참새부리 같은 입술로 잘도 떠든다. 일개 알바생이 사장보다 더 가게 장사를 걱정하는 이 판국이라니. 윤기는 끙, 뼈에 바람 들어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어 앞머리를 대충 정리했다. 어제 뿌리염색을 해서 한층 완벽해진 금발이 이마로 흘러내렸다. 쿠폰이고 나발이고 그 전에 걸레나 좀 제대로 짜 왔으면 말을 안 한다. 이건 뭐 바닥을 닦는 건지 물을 흩뿌리는 건지 원…….

 

 

"왜. 또 누가 트집이야."

"트집은 아니고 단골손님이요. 왜 그, 요 앞에 고등학교 교복 입고 맨날 드나드는 남자애 있거든요."

"남고딩이 단골에다 쿠폰을 들먹여? 걔는 대체 뭐하는 애냐?"

 

 

아무리 내가 이 가게 사장이라지만 보통 그 나이 대 남자애들은 케이크샵 따위를 들락거리며 쿠폰제 운운할 정서와는 좀 거리가 멀지 않나. 테이블이며 벽지, 천장까지 흰색과 연분홍색으로 도배된 마당에 일손이라곤 시커먼 장정 네 명이 전부인 가게의 괴리를 휘 둘러보고 윤기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로 내가 할 소린 아니구만. 철저히 동업자인 석진의 취향에 따라 꾸며진 가게 내부는 개점한 지 반년을 훌쩍 넘긴 시점임에도 여전히 윤기가 보기엔 몹시 괴랄했다. 인테리어를 걸고 한 가위바위보 내기에서 지지만 않았어도. 덕분에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주 고객 대부분의 여성들에게서는 사랑스럽다느니 예쁘다느니 하는 극진한 호평을 받았다.

 

얼마 전 메뉴를 추가하여 새로 뽑은 브로슈어들이 쇼케이스 위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윤기가 페이지를 대충 넘겨보는 동안 지민은 여전히 물 때문에 철떡거리는 대걸레로 바닥을 문지르면서, 그 어린애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소릴 했겠냐고 구시렁거렸다. 답답하면, 또 뭐. 윤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진열장 위에 두 팔을 괴었다. 비단 그 고등학생뿐만 아니라 꽤 여러 명이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석진이 지나가듯 일러준 기억은 있었다. 하여간 세상 사람들은 가끔씩 쓸데없는 일에서 이렇게 부지런을 떤다.

 

 

"맨날 딸기쇼트 아니면 생크림만 먹고 가는 걔?"

 

 

흰 조리복 차림의 석진이 때맞추어 주방에서 슬슬 걸어 나왔다. 요 앞에서 십 분씩 서성거리면서 정작 먹고 가는 건 비슷비슷하더라. 석진의 말에 카운터에서 영수증을 정리하던 호석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표정은 엄청 심각해 가지고. 귀엽죠. 지민이 뒤이어 외쳤다. 귀엽기도 한데 진짜 예쁘게 생겼지 않아요?

 

 

"박지민. 손님한테 흑심 품었냐?"

"아녜요! 사장님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째진 눈을 휘둥그레 치뜬 지민이 불 위의 마른 콩알처럼 팔짝 뛰었다. 보아하니 주방에 처박혀 있다시피 하는 윤기를 제외하면 그 어린 단골과 모두 한 번씩 일면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윤기는 혀를 차며 브로슈어를 한데 모아 케이스에 가지런히 꽂아 넣었다. 조리복 단추를 똑딱똑딱 뜯어내던 석진이 그래서, 쿠폰제 끝까지 안 할 거야? 라고 물었다. 딸기크림색의 얇은 맨투맨이 차이나식 칼라깃 안으로 빠끔히 드러났다.

 

 

"안 해. 누구 좋으라고."

"누구긴 너 좋으라고 하는 거지."

"아 귀찮아서 못해."

 

 

네네 알겠습니다. 석진은 여전히 불퉁한 표정의 지민과, 카운터에 한쪽 팔꿈치를 기대고 삐딱하게 서 있던 호석과 번갈아 눈을 마주친 뒤 어깨를 으쓱였다. 장사로 먹고사는 주제에 이 시대 귀차니즘의 진정한 모범표본인 민윤기 선생이 아니시던가. 적당한 포퓰리즘은 필요한 거라고 가끔 귀띔을 해 줘도, 케이크 파는 인간이 케이크만 잘 구워 팔면 됐지 자잘한 것까지 신경 쓸 깜냥이 있냐며 받아치니 할 말이 없었다. 하여간 옹고집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제 시간에 꼬박꼬박 출근하고, 직원들 급여일을 칼같이 챙겨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신기할 지경이었다. 금일로 근속일이 각각 4개월과 7개월을 넘어가는 지민과 호석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민은 처음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가게로 왔던 날 사장의 강렬한 첫 인상을 떠올렸다. 조명을 딱 하나만 남겨두고 어둡게 가라앉은 가게 안에서 발광체처럼 번쩍거리던 금발과, 그 아래 허연 얼굴의 콜라보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묘하게 늘어지는 말투 때문에 처음에는 취중면접이라도 당하는 줄 알았었다. 여차하면 담배 뻑뻑 피우다 밀가루 반죽에 재라도 떨어뜨릴 것처럼 보였으나, 의외로 젊은 사장은 일에 관해서는 완벽에 가까운 경지를 추구했다. 다시 말해 성격이 상당히 깐깐하다는 소리다. 시급도 센 편이고 일하는 시간대도 딱 좋아서 군소리 안 하기로 마음먹긴 했지만.

 

 

"그리고, 박지민. 걸레 좀 똑바로 짜서 닦아."

 

 

지금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뱉어낸 윤기가 속 시원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찰나였다. 출입문 위에 매달아둔 조그만 놋쇠종이 딸랑딸랑 청명하게 흔들렸다. 눈치껏 대걸레를 들고 화장실로 향하던 지민이 고개를 길게 뺐다. 브레이크 타임이라고 밖에 입간판까지 세워 뒀는데 누구지?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된 가운데, 열린 문 안으로 까만색 똥똥한 패딩에 코까지 폭 싸인 고등학생 하나가 슬며시 들어섰다. 어, 정국이! 지민의 두 눈이 금세 싹 접히며 특유의 눈웃음을 그렸다. 카운터의 호석도 반색을 했다.

 

 

"어이구, 오랜만이다? 근데 지금 브레이크 타임이라서 잠깐 쉬는 중인데. 어쩌나."

"아, 아뇨. 그게 아니라."

 

 

패딩점퍼에 입이 막혀 목소리가 웅얼웅얼 안으로 씹힌다. 한참 눈치를 살피던 고딩이 슬며시 등 뒤로 감추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받아든 호석의 얼굴이 그 즉시 아연해졌다. 지민이 갖은 솜씨를 발휘하여 큼지막하게 써 붙여둔 브레이크 타임 입간판이 처참히도 두 동강이 나 있었다. 반으로 뚝 부러진 BREAK와 TIME을 번갈아 보던 지민이 마른침을 삼켰다. 깐깐한 사장님이 가장 싫어하는 게 모양 무너진 케이크 팔아먹는 것과 기물 파손이었다. 제성에여. 침묵 속에서 다들 저만 쳐다보는 이 상황이 몹시도 부담스러웠던지 고딩의 목소리가 자꾸 기어들어간다. 호석이 응? 하고 되묻자,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이 마지못해 패딩 지퍼를 조금 끌러 내리더니,

 

 

"죄송해요……."

 

 

추위에 질려 창백해진 얼굴이 쏙 튀어나왔다. 조막만한 머리통에 신기하리만치 큼직한 눈코입이 알차게도 꼭꼭 들어찬 생김새였다. 데구르르 구르던 눈망울이 윤기에게로 와서 어적어적 멎는다. 겁먹은 티가 역력했다. 굳은 표정으로 부러진 팻말을 바라보던 윤기의 시선이 덩달아 아이의 얼굴로 옮겨갔다. ……음? 조리모를 거칠게 눌러쓰던 두 손이 제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뽀송뽀송한 얼굴에 두 눈을 고정한 채 그는 입을 반쯤 벌렸다. 음? 이건 뭐지?

 

 

"이게 쓰러져 있길래 세워두려고 했는데 갑자기 부서졌어요."

 

 

존나 말도 안 되게 취향인 얼굴인데?

 

 

 

 

 

핑크 스트리트 上

* 슙국

 

 

 

 

 

  난 언제쯤 이 집 케이크를 다 먹어볼 날이 오려나. 정국은 창가에서도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빈 포크를 오물오물 씹으며 생각했다. 뽀득뽀득 닦인 유리에 멍 때리고 있는 제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사실 뭣도 아닌 일인데 괜시리 서글픈 기분이 들어 코끝이 다 찡하다. 오늘 한파가 유독 극성인 탓인가. 깨끗하게 긁어먹어 얼마 안 되는 부스러기만 남은 케이크 접시에 딱 두 조각, 아니 한 조각만 더 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슬쩍 옆 테이블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들 눈치를 봤다. 파니니 하나를 시켜 나눠먹더니 이제는 아메리카노에 치즈와 초콜릿 케이크를 각각 한 조각씩 시켜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돈 걱정 없이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좋겠다. 아껴두었던 핫초코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테이블 아래로 두 다리를 쭉 펴는 정국의 옆으로 앞치마 차림의 호석이 휙 지나갔다. 복작거리는 손님들 시중을 드느라 여간 바빠 보이는 게 아니었다. 여기서는 알바생들의 몸에서도 설탕과 캐러멜, 절인 과일의 단 내가 폴폴 풍긴다.

 

남들 눈치가 보여서 매일 들락거리기도 뭣하고, 딱히 이런 취미―온통 꽃분홍색과 흰색으로 소녀스럽게 꾸며진 디저트 가게에 앉아 케이크에 포크를 꽂는―를 공유하는 친구도 없다. 널찍한 홀을 꽉 채운 손님들 중 사분의 삼 이상이 여자들끼리 온 일행인 가운데 교복 입은 남고생이 홀로 덩그러니 앉아있는 풍경은 사실 흔치 않을 거였다. 멋도 모르고 포털사이트 지도를 따라 이 가게를 처음 찾아왔던 날에는 유리문 안으로 보이는 바글바글한 여자들에 기가 질려 차마 들어가지도 못했었다. 심지어 쇼케이스와 카운터 앞에도 지갑을 꺼내든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쫄아 두 번 허탕을 치고 세 번째로 방문했을 때에야 정국은 겨우 가게 안에 첫 발을 디뎠다. 그 순간에조차 모든 여자들의 눈이 일제히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끔찍한 경험을 한 후, 그는 결계라도 뚫은 양 극도로 조심스러워졌다.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저렇게 난리들이지? 쇼윈도 밖에서 기웃거리고 있자니 여대생 세 명이 자그마한 상자 하나씩을 들고 깔깔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주방장 진짜 존잘이더라, 봤어? 난 알바생들도 귀여웠는데. 사장 얼굴도 보고 싶었는데 결국 못 보고 가네. 케이크가 맛있다는 집에서 케이크 맛이 아니라 가게 직원들 외모를 찬양하는 뒷모습을 보며 정국은 아리송한 기분이 됐었다.

 

가격은 솔직히 빈말로라도 결코 착한 편이라고는 못 하겠다. 한 조각의 크기가 웬만한 가게들보다 훨씬 큼직하긴 했으나 한창 뱃속에 뭘 밀어넣느라 바쁠 나이의 사내아이에게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애당초 케이크로 배 채울 생각도 없었지만, 달랑 한 조각만 먹고 나가기엔 못 견디게 아쉬웠다. 높은 진입장벽을 세 번의 방문 끝에야 겨우겨우 뚫고 들어온 데 대한 억울함도 있었다. 김태형만 아니었어도 이 집 케이크 맛을 죽을 때까지 몰랐을 테니 고마워해야 하나, 원망해야 하나.

 

같은 반 친구인 태형은 잘생긴 얼굴 덕분에 특별한 기념일이 아니더라도 심심찮게 인근 여고 애들에게서 각종 선물을 받았다. 인형도 있었고 비싼 초콜릿 상자도 있었고 과자들이며 편지도 있었는데, 한 번은 점심시간에 큼지막한 상자 하나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그게 태형의 생일 다음 날이던가 그랬다. 척 보아도 케이크 상자였다. 귀퉁이마다 장미인지 국화꽃인지 모를 겹꽃무늬가 섬세하게 돋아난, 태형의 취향이라기엔 좀 지나치게 소녀풍인.

 

 

'케이크 먹을래?'

'먹을래.'

 

 

정국도 지극히 평범한 열여덟 남자애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세상에 태어난 수많은 이유들 중 하나가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서라 자부하는 만큼 식도락을 즐겼다. 매운 것이고 단 것이고 짠 것이고 입맞에만 맞으면 가리지 않고 넘길 수 있었다. 당과류도 무척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케이크를 특히 좋아했다. 다만 이게 양에 비해서 대체적으로 가격대가 쎈 음식이라 특별한 날 아니면 먹어보기가 힘든 것이 애통할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케이크 하나 먹으러 카페까지 찾아가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성미도 아니었다.

 

태형은 상자에 딸린 플라스틱 나이프로 어설프게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 정국에게 내밀었다. 들고 오는 도중에 모양이 좀 뭉개지긴 했지만 딸기가 콕콕 박힌 것이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생크림 쉬폰 케이크였다. 방금 급식 먹은 것도 잊고 정국은 촉촉한 시트를 야무지게 씹었다. 미친 이거 존나 대박…… 욕이 반 이상 섞인 감탄사를 빵과 함께 꿀떡 삼키는 정국의 입가를 태형이 엄지손가락으로 투박하게 닦아 주었다.

 

 

'이거 요 앞에 새로 생긴 가게 거래. 맛있지?'

'응.'

 

 

존나 맛있어.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맛있었다. 나 맨날 파리바게트나 뚜레쥬르 같은 데서 사다먹고 그랬는데 그건 케이크에 대한 모독이었나 봐. 눈 깜짝할 새 첫 조각을 다 해치운 정국은 태형에게 묻지도 않고 한 조각을 더 잘라갔다. 마음 같아서는 한 판을 혼자 다 먹어치우고도 남았을 테지만, 귀신같이 빵 냄새를 맡고 몰려온 친구들 때문에 그 이상은 맛보지 못했다. 그 가게가 어디 있더라?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유명한, 벌써 동네 주민들의 입소문을 타서 다른 동네 사람들까지 알음알음 찾아온다는 가게가. 지나가다 얼핏 보았던 큼지막한 흰색 간판이 떠올랐다. 가끔 학원 때문에 지나다니는 번화가 골목길의 안쪽에 숨어 있어서, 일부러 찾아들어가지 않는 이상 좀처럼 눈에 띄기 힘든 곳이었다. 정국은 케이크 상자에 새겨진 가게명을 외워 검색창을 두드렸다.

 

슈가 스트리트.

 

엔터를 누르자마자 검색결과가 주르르 떴다. 눈대중으로 훑어도 어딜 보나 찬사뿐이었다. 가장 윗글을 클릭하니 보기만 해도 절로 코끝에 설탕내가 풍기는 듯한 가게 내부를 여기저기 찍어둔 사진이 보였다. 케이크와 타르트 전문인 사장도 남자고 식사류 전문인 주방장도 남자고 알바생 두 명도 전부 남자인데 하나같이 얼굴이 너무 훈훈해서 케이크 맛이 더 좋아진다는 온갖 감탄사와 미사여구를 떨떠름하게 읽던 정국은 이윽고 케이크 근접샷에서 스크롤을 멈추었다. 와, 비주얼 장난 아니다. 다 맛있어 보여. 자습 시간 내내 슈가 스트리트의 메뉴와 케이크 맛 따위를 정독하느라 시간을 몽땅 날린 정국은 하교할 때 즈음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파졌다. 또 먹었으면 좋겠다. 이만큼 큰 거 한 판 통째로 끼고. 평생 못 잊을 것 같은 맛이었는데.

 

 

 

 

 

  "추운데 따뜻한 거 좀 마시고 갈래?"

 

 

  석진이 핑크색 맨투맨 소매를 약간 걷어 올리며 상냥하게 물었다. 한창 영업 중일 때와 달리 조용한 가게 내부를 신기한 듯 둘러보던 정국이 화들짝 놀라 네? 하고 되물었다. 동그란 눈매에 동그란 콧망울에 동그랗게 벌어진 입술이 토끼가 따로 없다. 꼭 피크 타임일 때에만 찾아와서 진열장 앞에서 한참을 밍기적대다 매번 가장 저렴한 메뉴와 코코아만 먹고 가던 애다. 어쩌다 홀을 내다볼 일이 생기면 저만치 외진 자리에 혼자 앉아서 포크를 입에 물고 핸드폰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게 떠올랐다. 석진은 실실 웃으며 쇼케이스 뒤 벽에 붙은 음료수 보드를 가리켰다.

 

 

"뭐 만들어 줄까?"

"아, 괜찮아요."

"서비스로 주는 거야. 사양하지 말고. 뭐 마실래?"

"어, 저……핫쬬코요."

 

 

핫쬬코라니 발음도 어지간히 깜찍하게 샌다. 석진이 주방으로 들어간 사이 하릴없이 카탈로그나 다시 정리하고 있던 지민이 잽싸게 정국 옆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 수많은 손님들 가운데서도 유독 눈에 띄다 보니 얼굴을 익혀서 어느 정도 말도 텄다. 싱글싱글 웃는 지민에게 어색하게 마주 웃어주며 정국은 슬며시 두꺼운 패딩점퍼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았다. 아무래도 실내에다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둔 탓인지 좀 덥다.

 

 

"정국이는 왜 맨날 올 때마다 비슷한 것만 먹어? 우리 수플레랑 몽블랑이 시그니쳐인데. 생크림 좋아해서 그래?"

"아, 그게 아니라."

 

 

차마 자주 와서 마음대로 시켜먹기엔 가격이 너무 비싸서요, 라고 털어놓을 수 없어서 정국은 입술만 앙 물었다. 망설이는 표정을 살피던 지민이 눈치 없이, 비싸서 그런가? 하긴 우리 가게가 좀 비싸긴 하지? 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그래놓고 목소리가 너무 컸다 싶었는지 얼른 뒤쪽에 서 있는 윤기의 눈치를 봤다. 윤기는 정국이 등장한 이후 내내 팔짱을 끼고 쇼케이스 너머에 서서 가게 안의 이들을 말없이 지켜보는 중이었다. 정국은 지나치게 화려한 그의 금발머리를 눈만 움직여 몰래 훔쳐보았다. 연예인도 아니고, 일반인 남자한테 저렇게 밝은 금발은 어울리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피부가 몹시 하얘서 그런지 기깔나게 잘 어울렸다. 서늘한 눈매와 또 마주칠세라 얼른 시선을 사리는데 타이밍 좋게 석진이 마시멜로를 띄운 핫초코 잔을 내려놓았다.

 

 

"사장님, 들으셨죠? 그러니까 빨리 쿠폰을 써야 한다니까요?"

"시끄러."

 

 

윤기는 뚱하게 받아쳤으나 실은 가늘게 뜬 눈으로 저 새파랗게 어린 고딩을 샅샅이 스캔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존나 빵실빵실한 머랭같이 생겼네. 입에 넣어서 굴리면 녹아버릴 것 같다. 스트레이트인가? 아니면 가능성이 있나? 골몰하는 윤기에게 지민이 소근거리는, 하지만 뻔히 다 들리는 귓속말로 기습을 날렸다.

 

 

"원래 말투가 저러셔. 화난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윤기는 말없이 허리를 숙여 부러진 입간판을 주워들었다. 기물파손. 제가 그런 것도 아니면서 뒤통수가 따가워진 지민이 잽싸게 말머리를 돌렸다.

 

 

"다음부턴 이 시간부터 다섯 시 반까지만 피해서 오면 돼. 장사 안 하거든."

"네에."

"근데 왜 맨날 혼자 먹으러 와? 여자친구 없어?"

 

 

두 동강 난 간판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던 윤기는 지민의 단어를 포착하고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뜨거운 초콜릿을 호호 불어 마시느라 정국이 대답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무의식중에 그 오종종한 입술의 움직임에 집중하느라 윤기의 눈초리가 한층 더 가늘어졌다.

 

 

"없어요."

"왜? 이렇게 잘생겼는데."

"저희 학교 남고라서……딱히 좋아하는 사람도 없구요."

 

 

아암, 그래야지. 남고라면 연애는 당연히 지양해야 마땅하지. 정말 더없이 올바른 가치관이 아닐 수 없구나. 덤덤한 무표정 뒤로 박수를 치면서 윤기는 지민과 호석에게 둘러싸여 음료를 마시는 정국을 물끄러미―집어삼킬 듯이―바라보았다. 나름 자주 들락거리는 손님이라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얼굴 본 기억이 없는데, 저 두 녀석은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고 이름을 들먹이고 깔깔 웃기도 하는 게 묘하게 배알이 꼴렸다. 저 예쁜이 이름이, 뭐, 전국? 전국이라고?

 

 

"저, 그거 물어드려야 돼요?"

 

 

정국이 턱짓으로 윤기의 손에 들린 간판을 가리키며 어물거렸다. 생각 없이 간판 표면을 손톱으로 긁고 있던 윤기는 제풀에 움찔하며 얼른 나무 토막으로 전락한 그것을 내려놓았다. 아뇨, 괜찮아요. 별로 비싸고 그런 것도 아닌데. 일부러 무미한 말투로 대답했다. 걱정스러워하던 얼굴이 무게 없이 가벼운 대답에 한결 편하게 풀어진다. 저토록 드러내놓고 솔직한 표정 변화라니. 한동안 그 모습을 관찰하다 제자리로 돌아가던 윤기의 시선이 석진과 잠깐 부딪쳤다. 한 곳에 끈덕지게 붙박인 눈을 다 보았는지, 잘난 얼굴에 미심쩍음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었다. 안데스 산맥의 알파카처럼 생긴 게, 의외로 눈치가 칼이다.

 

핫초코 한 잔을 깔끔하게 비운 정국은 학원 갈 시간이 되었다며 주섬주섬 일어났다(학원이라니, 이 또한 얼마나 고딩스러운 키워드인가). 윤기는 그때까지도 내내 하릴없이 쇼케이스 뒷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정국을 배웅하고 돌아온 호석에게 이상한 시선을 받았다.

 

 

"사장님 거기서 아까부터 뭐 하세요……? 무섭게."

"정호석."

"옙."

"이따 도장가게 가서 스탬프 좀 파와. 쿠폰 용지도 끊어오고."

"예?"

 

 

 

 

 

  그러니까 민윤기는, 더도덜도 말고 딱 남들만큼의 윤리적 기준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취향 내지 호불호에 관해서만큼은 그 기준이 한없이 관대해지는 편이었다. 7년 지기인 석진이 종종 넌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어, 하고 구시렁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소리였다. 윤기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했고, 다른 것들은 다 제쳐두고서라도 일에 있어서만큼은 완벽을 기했으며, 그 덕분에 일터에서는 한없이 까칠해졌다. 하지만 일단 직장을 벗어나 사생활로 접어들면 그와는 딴판으로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이었다. 일주일 중 하루 휴무인 수요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 처박혀 보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식사는 배가 고플 때에만 냉장고 속에 있는 걸로 때우면 그만이었고,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뭐든 적당히. 구애받지 않고 구애하지 않도록. 학생 시절부터 자신의 성향을 일찌감치 자각하고 있었던 그는 남자와 여자를 번갈아 가며 엇비슷한 비율로 만났다. 여자는 여자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었고 남자는 남자 나름대로 만나기 편한 구석이 있었다. 무슨 기준으로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인지 모를 만큼 대중없었다. 그저 마음에 드는 점이 한두 가지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실은 진짜로 누굴 좋아해서 연애한 경험이 없는 건지도 모르지. 이 나이까지 먹고서 말이야, 윤기는 가끔 생각한다. 그럴 만한 게 지금까지 한 번도 취향에 직격으로 들어맞는 상대를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알고 지내다 보니 눈에 차는 구석이 보여 사귄 적은 있어도, 첫눈에 묵직한 스트라이크를 먹고 어떻게든 만나봐야겠다 결심했던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연애횟수는 적잖았지만 헤어질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념상의 아픔을 느껴본 적도 없다. 윤기는 늘 그 정도로 만족했다. 이런 게 자신의 부족한 점이라면 자신이 먼저 너그러워져야 상대도 보다 자신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웬걸. 서른 줄을 얼마 남겨두지도 않고서 평생 처음으로 필이 팍 꽂히는 상대를 만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건 민윤기의 연애를 매번 말도 해주지 않았는데 귀신같이 눈치채고야 마는 김석진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것도 미자를. 교복도 못 벗은 핏덩이를. 하지만 윤기는 죄책감보다 감정에 과감히 솔직해지는 쪽을 택했다. 별로 체감되지도 않는 아청법 따위를 들먹이며 이대로 떠나보내기엔 똥똥한 패딩 차림으로 뒤뚱거리며 가게로 들어오는 저 고딩이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아니, 뭘 먹고 자라면 저렇게 생길 수가 있냔 말이야? 누가 나 취향 난도질하려고 의도적으로 빚었나? 숨 돌릴 틈 없이 새 케이크와 파이를 구워 내다놓고, 겨우 밀가루 묻은 손을 툭툭 털면서, 남은 자리들 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데를 골라 앉은 고딩의 까만 머리통을 먼 시선으로 바라보던 윤기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카메라가 있었다면 필름 한 통을 꽉 채우고도 남았을 거다. 햇살 잘 들어오고, 인물 예쁘고, 구도 완벽하니, 죽이네. 진열대 앞에서 브로슈어를 훑어보고 있던 손님이 파티션 밖으로 나온 윤기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사장님 요새 자주 나오시네요?"

"아, 네. 답답해서."

 

 

윤기는 하하, 바람이 잔뜩 들어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석진이 조왕신이냐고 놀려댈 만큼 주방에서 두문불출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주방 옆으로 따로 난 작은 문을 열면 원래 창고 대용으로 쓰려 했다가 대신 소파와 작은 티 테이블 하나를 갖다놓은 쪽방이 나왔다. 컨디션이 난조일 때면 브레이크 타임에 그 방으로 들어가 잠깐 눈을 붙이곤 했었는데, 정국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는 그럴 시간이 몽땅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든 남들 눈에 띄지 않을 자리만 찾아 앉는 정국의 위치는 주방 입구에서 잘 보이지도 않았으므로 파티션 너머 쇼케이스까지 걸어 나와야 했다. 그러면 저만치에서 까딱거리는, 반질반질한 검은색 머리통 꼭지를 볼 수 있었다. 

 

사실 이래저래 얼굴 팔리는 게 못마땅했던 것도 윤기가 밖으로 잘 나서지 않은 이유였다. 석진은 개점 때부터 이미 잘생긴 주방장으로 유명했고, 지민과 호석은 가끔 포털에서 가게 이름을 검색할 때마다 자신들의 외모 칭찬이 나온 글을 골라 보면서 즐거워했다. 어디서 뭘 주워듣고 왔는지 사장 얼굴을 보겠다고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았다. 제발 몰래 사진 찍어가는 짓만 하지 말았으면 참 좋겠건만. 팔자에 없는 연예인도 아니고. 어쩌다가 블로그나 카페 사진에서 손톱 크기로 찍힌 자신의 뒤통수라도 발견하면 심기가 영 불편해졌다.

 

 

"이건 새로운 메뉴네요? 뭐 들어간 거예요?"

"자허토르테라고 초콜릿 케이크 사이에 살구잼 바른 거예요. 그건 바노피. 캐러멜 소스에 바나나랑 크림 다져넣은 거요."

"머리는 어디서 염색하셨어요?"

"네?"

"색깔 너무 예뻐요."

"아, 예. 탈색이요. 탈색."

 

 

중구난방인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 주는 게 제일 힘들다. 대체 빵 사러 와서 남 머리 색깔을 물어보는 건 무슨 꿍꿍인지. 석진은 절대로 손님들 앞에서 성가셔하는 티를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다 입소문이라도 잘못 돌면 장사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거듭 일렀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윤기도 곧이곧대로 따랐다. 하여간 대한민국의 서비스정신은 이래서 문제다. 쓰잘데 없는 잡소리를 길게 이어나가는 손님을 겨우 보내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윤기는 허공에서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늘 물기가 밴 것처럼 반짝거리는 눈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왜 쳐다보지?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조리모 때문에 머리가 좀 삐쳤나? 고작 일 초 동안 윤기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수십 가지의 의문들과 관계없이, 정국은 버릇대로 포크를 씹으며 윤기의 빛나는 금발을 넋 놓고 구경 중이었다. 레몬크림 색깔이다. 아주아주 옅은 노란색. 어디서 보니까 여기 레몬타르트가 진짜 맛있다구 그랬는데. 너무 비싸다. 언제 먹어보지…… 점점 간절해지는 눈빛으로 애타게 머리칼에서 시선을 못 떼더니, 어어어 고개 내려간다. 윤기는 자신도 모르게 정국을 따라서 한껏 치켜들었던 턱을 내리다가, 문득 쇼케이스 앞에 아직도 손님이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표정을 굳혔다.

 

 

"사장님?"

"네, 네. 뭐 주문하셨죠?"

"레드벨벳 하나랑 수플레 하나 포장해 주세요. 따로요."

 

 

평소엔 망했다는 말 어감 싫어해서 잘 안 쓰는데.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좀 망한 것 같다. 윤기는 호석에게 주문을 넘기고 삐치지도 않은 앞머리를 정리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사라지는 금색 뒤통수를 아쉽게 바라보던 정국은 남은 케이크 조각을 포크로 자근자근 쪼갰다. 시나몬 향이 솔솔 올라오는 당근 케이크다. 이것도 맛있긴 했지만 썩 취향은 아니었다. 사실 이 가게에 처음 왔을 때부터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은 화려한 빛깔의 베리가 잔뜩 올라간 트리플 베리 타르트였다. 심사숙고 끝에 아주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포털 검색결과에서도, 카탈로그에서도 가장 눈길을 잡아끄는 비주얼이었지만 일반 케이크보다 삼천 원은 더 비쌌다. 그렇다고 타르트 한 조각만 먹고 가기엔 너무 아쉽고. 정국은 얄팍한 제 지갑 사정에 다시금 울적해졌다.

 

손목시계를 보니 얼추 학원에 갈 시간이 다 됐다. 그래도 버스 타고 가면 이른데 여기서 좀 더 기다렸다 갈까. 손가락을 문지르며 고민하는데 테이블 위로 그림자가 슥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큼, 하고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하는 금발머리 사장이었다. 놀란 정국은 아무 말도 못하고 댕그란 눈만 깜빡거렸다. 방금 분명히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오늘은 당근케이크 먹어요?"

 

 

밑밥을 까니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남이 쳐다보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케이크 시트를 찌르는 포크질이 한결 소심해졌다. 꼬물거리는 손가락들. 윤기는 최대한 유연하게 얼굴 근육을 움직여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친절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새로 나온 것도 맛있는데. 다음에 올 땐 바노피 한 번 먹어봐요. 추천할게."

 

 

은근슬쩍 반말을 섞어 써도 눈치를 못 챘는지 반응이 없다. 윤기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실컷 울부짖는 중이었다. 아 시발 얘 진짜 뭐지. 심지어 가까이서 보니 더 예뻤다. 완벽하게 세팅된 생크림 시트 위에 마지막으로 콕 얹어놓은 딸기 같다. 그것도 탱글탱글 잘 익은 일등급 딸기. 한편 정국은 정국대로 눈앞에 나타난 사장의 비현실적으로 하얀 피부와 레몬색 머리카락 따위에 정신이 팔렸다가, 뭐가 제일 먹고 싶어요? 묻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그, 딸기……."

"네?"

"그, 딸기랑 막 빨간 과일 같은 거 올려서, 이만한 파이 있잖아요."

 

 

허접한 설명을 찰떡같이 알아듣기 힘들었던 윤기가 얼른 브로슈어를 꺼내어 내밀었다. 정국은 소심하게 손가락으로 트리블 베리 타르트를 콕 찍었다. 고르는 것도 꼭 지 같은 것만 고르네. 크레페도 마롱 머핀도 쉬폰도 아니고 베리 타르트라니. 아 진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에서 귀여움이 줄줄 떨어지니 아주 죽겠다. 윤기는 솟구치는 광대를 억지로 내리누르며 침착한 말투를 짜냈다. 이 어린애를 어떻게 꼬시냐고? 애들은 먹을 걸로 꼬드기는 게 역시 제일이다.

 

 

"트리플 베리는 벌써 다 나갔는데. 오늘 저녁 아홉시 반쯤에 시간 돼요?"

"네?"

 

 

어리둥절한 정국을 향해 윤기는 쐐기를 박듯 씨익 웃었다.

 

 

"괜찮으면 가게 잠깐 들러요."

 

 

 

 

 

  케이크가 모두 팔려나가는 대로 문을 닫는 시간은 대개 아홉시 반에서 열시 사이였다.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 예약해 둔 생일케이크를 가지고 방금 돌아갔다. 가게 불이 꺼지고 주방은 깨끗하게 닦였다. 핑크색 후드티를 뒤집어쓴 석진은 오늘따라 밥 찾는 손님들이 많았다며 에구에구 죽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눌린 머리를 슥슥 정리하고 나가는 게 어디 꼼장어라도 먹으러 가는 모양이었다. 뒷정리를 마무리한 호석이 평소 같았으면 벌써 겉옷을 챙겨 입고도 남았을 윤기를 살피며 물었다. 사장님 집에 안 가세요? 일부러 카운터에서 밍기적거리고 있던 윤기는 대답 대신 손만 휘휘 저었다. 묻지 말고 알아서 가라, 는 게 역력한 몸짓에 호석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잰 걸음으로 나갔다. 칼퇴근 못 하면 지구 두 쪽 나는 줄 아는 사람이 웬일이래. 호석까지 떠나고 나자 윤기는 주방으로 들어가 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아홉시 반이었다.

 

삼분쯤 더 기다리자 애써 죽인 듯 소심하게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아까의 똥똥한 패딩 대신 도톰한 검정색 항공점퍼에 빨간 목도리를 둘둘 만 정국이 쓱 들어섰다. 등딱지처럼 매달려 있는 백팩. 학원이라도 다녀온 모양이었다. 나 어려요, 아직 애기예요, 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한 옷차림에 윤기는 애써 웃음을 잇새로 밀어 넣었다. 안녕하세요오. 수줍게 인사하는 정국에게 미리 잘라놓은 타르트 한 조각을 포크와 함께 내밀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한 판을 아예 새로 구웠다. 예쁜 고딩의 눈망울이 과장 좀 보태어 찻접시만큼 커졌다.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먹고 싶다면서요."

"……."

"선물이라 생각하고 그냥 먹어요."

 

 

단골 서비스니까. 석진이 들었으면 코웃음 칠 소리를 주워섬기며 윤기는 입동굴을 드러냈다. 날선 인상 때문에 경계태세를 못 버리던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웃어주면 어느 정도 느슨해진다.

 

정국은 좀 떨떠름해하면서도 싫지는 않은 기색으로 주춤주춤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이유도 가르쳐주지 않고 대뜸 오라고만 하길래 그냥 가지 말까 고민했었는데. 실은 학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달려와서 십 분이나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보이지 않을 만한 곳에 숨어 한참 서성거린 터였다. 날이 어찌나 추웠는지 목도리 위로 드러난 정국의 두 뺨과 코끝, 귓불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만져주고 싶다. 조물조물 만져서 녹여주고 싶다. 윤기가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정국은 포크로 타르트를 서툴게 짓뭉갰다. 아차 싶은 윤기가 얼른 나이프를 가져와 타르트를 여러 조각으로 쪼개 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정국은 두 손까지 모으고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인 뒤 조각난 타르트를 오물오물 씹었다. 도톰하게 올라와 실룩거리는 볼이 먹이주머니처럼 앙증맞았다. 웃는 거 봐. 기분이 좋아져 헤실헤실 웃으니 안 그래도 순한 눈꼬리가 아래로 똑 떨어졌다. 맛있어요? 네 맛있어요. 슬쩍 묻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야지, 누가 만든 건데.

 

 

"쿠폰 하나 끊어줄게요. 도장 열두 개 모으면 케이크 하나 공짜."

"진짜요?"

"아무거나."

"우와."

"이름이 뭐예요?"

 

 

대답을 머뭇거리는 면전에서 윤기는 뻔뻔스레 핑계를 댔다.

 

 

"쿠폰 만들게 미리 알아놓으려고. 전화번호도."

"아……."

"그래서 이름이?"

"전정국이요."

 

 

정국. 전정국. 입을 크게 벌리지 않는 글자로만 만들어져 오물거리는 발음. 윤기는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아기자기한 가게내부와 달리 심플하기 그지없는 명함 위에 금색 볼드로 이름이 박혀 있었다. 민윤기.

 

 

"민윤기……?"

"사장이에요."

"아……사장 아저씨……."

"아저씨 아니고 형."

 

 

웃고 있음에도 어딘지 단호하게 느껴지는 윤기의 말투에 정국은 어설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얘는 아직 열여덟 살밖에 안 먹었고 나는 이제 이십대 후반이지만 그래도 벌써 아저씨 소리 들을 주제는 아니지. 속으로 위안한 윤기는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케이크 좋아하나 봐요. 단골이라더니."

"맛있잖아요."

"브레이크 타임이나 마감할 즈음에 오면 서비스 줄게요."

 

 

메뉴 개발도 해야 되고, 폐기처분도 해야 하니까. 대신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니까 혼자서만 알고 있어요. 파격적인 팁을 지나치게 덤덤하게 일러주는 윤기를 쳐다보며 정국은 자신의 섣부른 판단이 참 못난 짓이었다고 생각했다. 첫 인상이 너무 써늘해서 악독하고 무서운 고용주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팁까지 알려주고, 먹고 싶었던 케이크도 따로 불러서 먹여주기까지 하니 좋은 사람인 모양이다. 물론 그 호의가 어딘지 약간 과장된 듯한 감은 있지만…… 이렇게 잘해주니 저도 무언가 답례를 해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압박감에 사로잡힌 정국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저, 말 놓으셔도 돼요."

"그럴까?"

 

 

아니 그렇다고 또 이렇게 바로 승낙할 줄이야.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일단 입으로 들어오는 타르트가 너무 맛있었으므로 다른 생각이 금세 흐려졌다. 맛있어. 정국은 접시위로 떨어진 블루베리를 포크날마다 하나씩 콕콕 찍었다. 완두콩만한 과육에서 즙이 터져 흰 접시를 보라색으로 물들였다. 약간 숙인 머리 위로 떨어지는 시선이 집요하면서도 다정했다. 몰랐는데 젊은 사장은 목소리도 좋았다. 나른하고, 낮고, 울림이 깊다.

 

 

"서비스 많이 줄게. 자주 와."

 

 

머쓱하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버릇이 있나보다. 몽톡한 손가락이 애꿎은 앞머리를 쓸어내리는 모습을 구경하며 윤기는 뭉근하게 미소 지었다.

 

 

"매일 와도 돼."

 

 

그래주면 더 좋고.

 

 

 

 

 

  때 아닌 겨울비가 주룩주룩 쏟아졌다. 지민은 물이 질질 흘러내리는 쇼윈도 밖을 한 번 내다보고 주방을 흘깃거렸다. 차갑고 눅눅한 공기가 뺨과 손가락에 달라붙어 찜찜했다. 아무튼 오늘 같은 날 사장님을 잘못 건드리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태생적으로 저혈압이 있는 민 사장은 아침기상이 세상에서 가장 짜증스럽고 힘든 일 중 하나였다. 잠을 유독 못 잔 날이면 일어나려 용쓸 때마다 종이뭉치라도 쑤셔박은 양 가슴께가 답답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데 전날 늦게까지 못 자기라도 했다면 불쾌함이 극에 달했다. 신경통 있는 노인네도 아니고. 아무데나 들쑤시며 화풀이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의 민윤기는 몹시 심통 난 고슴도치 같았으므로 절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

 

궂은 날씨 덕분에 평소보다 손님은 훨씬 적었다. 오전 장사를 끝내자마자 윤기는 주방 구석의 쪽방으로 들어가서 쉬었다. 점심 먹겠냐고 석진이 두 번이나 물으러 와도 됐다고 고개만 저었다. 기분 탓이 아니더라도 원래가 살기 위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인간이었으므로 지민과 호석도 그러려니 했다. 날도 꿀꿀하니 치킨이나 시켜먹자고 전단지 책자를 펄럭이는 호석을 따라 세 사람 모두 홀에 모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유리문이 슬며시 열렸다. 찬 기운과 습기를 한 가득 끌어안은 정국이었다.

 

 

"정국이 왔어? 우리 치킨 시킬 건데 먹을래?"

"먹을래요!"

 

 

낯가리는 것도 이제 거진 끝난 모양인지 청바지와 점퍼에서 빗물을 툭툭 털어내던 정국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아이고 우리 정국이가 웃으니까 가게에 꽃이 피네 꽃이 펴. 아저씨 같은 소리를 들먹이며 호석이 핸드폰을 꺼내 치킨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형 콜라도 큰 걸로 두 개 시켜 주세요. 지민이 재빨리 주문을 추가했다. 정국은 이제 익숙하게 석진의 옆자리를 꿰차고 앉아서 습기 때문에 축 처진 앞머리를 매만졌다.

 

온통 설탕과자 냄새를 풍기는 이 가게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하고, 얼굴도 잘생겼고, 성격도 좋다. 덕분에 처음에는 반찬 훔쳐 먹은 강아지 새끼처럼 눈치를 보던 정국은 이제 브레이크 타임만 골라서 찾아왔다. 아무래도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혼자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 있느니, 이쪽이 훨씬 편했다. 큰 눈만 데록데록 굴리고, 말 트는 데에만 백년쯤 걸릴 것 같더니 웃기도 잘 웃고 주거니 받거니 농담도 잘 했다. 석진은 급식 따위로는 한창 성장기인 고딩의 주린 배를 다 채울 수 없을 거라며 정국이 올 때마다 항상 뭔가를 만들어서 내왔다. 파니니도 만들었고 샌드위치도 만들었고 가끔은 필라프나 파스타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손사래를 치며 사양하던 정국은 돌아갈 때 계산대에 돈을 놓고 달아났다. 그러기를 두세 번 반복하더니 제풀에 지쳤는지 이제는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잘 먹겠습니다, 인사부터 한다. 말랑말랑한 애교살 위로 깊게 접히는 눈꼬리가 귀여웠다.

 

 

"윤기 형은 어디 계세요?"

 

 

어둑한 가게를 두리번거리던 정국이 물었다. 마라핫을 먹자느니 볼케이노를 먹자느니 아웅다웅 다투고 있던 지민과 호석이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듯 동시에 정국을 돌아보았다. 필요 이상으로 박진감 넘치는 반응에 움찔한 정국의 입술이 동그랗게 오므라들었다. 왜, 왜요? 석진의 옷소매를 붙들며 묻는데 때마침 주방 파티션이 걷히고 부스스한 머리의 윤기가 나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앞머리가 창백한 얼굴을 반쯤 가린 채였다.

 

이것들이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말은 안 했지만 윤기는, 지금 관자놀이까지 혈압이 꽉꽉 차오른 상태였다. 평소에도 결코 조용한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요란스럽게 구는 알바생들의 목소리에 질린 그의 낯빛이 귀신처럼 창백했다. 흉흉한 기운을 가장 먼저 포착한 지민이 사색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저, 저희 치킨 시킬까 했는데…… 서늘한 분위기에 눌린 호석도 채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닿는 것은 죄다 썩썩 썰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모여앉은 이들을 둘러보던 윤기의 눈이 그 가운데 천연덕스럽게 끼어 있는 정국을 발견했다. 비가 쏟아지는 밖에서 방금 들어왔는지 입고 있는 구스다운 점퍼의 모자털에 물기가 송송했다. 눈이 마주친 정국이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형 저 쿠폰 받으러 왔어요!"

 

 

형? 혀어엉? 그리고 쿠폰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두 번이나 윤기를 형이라 칭하는 것을 듣고 나머지 세 사람의 눈이 일제히 윤기에게로 달라붙었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시선에 윤기는 피곤한 듯, 혹은 무심한 듯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잔뜩 날이 섰던 눈빛이 어느 틈에 유하게 풀어졌다.

 

 

"잘했어. 이따 줄게."

 

 

담담하지만 퍽 다정한 어투였다. 윤기가 정국의 맞은편에 앉자 의자 다리가 바닥을 북 긁었다. 하품을 쩍 하는 사장과 헤실헤실 웃는 정국을 번갈아보던 지민이 기막힌 표정으로 물었다.

 

 

"사장님 우리 쿠폰제 안 할 거라면서요."

"테스트야 임마."

"정국아, 너 사장님 형이라고 불러?"

"형이……"

 

 

그렇게 부르랬는데요. 정국은 벌써 까마득한 옛적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석진은 혹시나 했지만 결국엔 내 이리 될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민은 충격을 못 이겨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호석은 주문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건수 잡았다며 날뛰었다. 둘의 기준에서 이건 세계 불가사의와 경중이 맞먹는 상황이었다. 사장님 기분 별로인 날이면 그날은 온 가게 안이 슈퍼냉동고가 되어서 누가 멘탈 털리지 않고 무사히 살아나가느냐가 모두의 관건이 되는데, 형이라니. 거기다 저 미륵불 같은 미소라니.

 

 

"와 언제부터? 둘이 나 모르는 사이에 뭐 있었어요?"

"정국이 나도 형이라고 불러! 왜 나한테는 호칭 생략해? 사장님보다 내가 훨씬 어린데?"

"조용히 해 짜식들아."

 

 

생크림 깍지로 얻어터지기 전에. 방금 전까지 자다 깬 덕인지 퉁퉁거리는 윤기의 얼굴에서 반들반들 윤이 났다. 그나마 유일하게 침착함을 고수하고 있던 석진은 괜히 정국의 가지런한 생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래 얘가 민윤기 취향이었지. 최근 몇 년간 연애하는 꼴을 못 봐서 잠시 까먹고 있었다. 요즘 꽤 오랫동안 애인이 없었던 탓에 한 번 심사 꼬이면 그토록 예민하게 굴었나 싶기도 했다.

 

개점과 동시에 호석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지난 장마철은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칼밭 위에 쳐놓은 외줄을 맨발로 타는 분위기였다. 앞서 말했듯 윤기는 애꿎은 데 살풀이를 할 만큼 글러먹은 인성은 아니었지만, 아직 홀 서빙에 서툴렀던 호석이 주문을 잘못 찍거나 뭘 깨뜨리는 등 자잘한 실수를 할 때마다 계산서나 깨진 컵 따위를 집어들고 물끄러미 내려다보곤 했었다.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호석의 입술은 시옷 모양으로 변했다. 윤기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입꼬리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한창 일손이 딸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때 구세주처럼 지민이 들어와 어찌나 다행이었는지, 지금도 떠올리기만 하면 눈물이 다 난다. 그랬던 사람이 어떻게 저토록 녹작지근하게 풀어질 수 있는 거지?

 

 

"정국아, 먹고 싶다던 건 먹어 봤어?"

"네. 베리타르트? 그거 맛있던데요."

"언제?"

"윤기 형이 주셨어요. 저번에 혼자 왔을 때. 밤에요."

 

 

그건 또 언제……? 충격에 절여진 지민의 손톱이 테이블을 가냘프게 긁어댔다. 여기 오래 앉아 있다간 쓸데없는 공격만 받겠다 싶어 윤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브레드 카트를 주방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뭘 먹든 상관없는데 그 이상한 과일 맛 치킨은 시키지 마. 존나 토할 뻔했으니까.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휭하니 사라져 버린 사장의 뒷모습을 입 떡 벌리고 지켜보던 세 사람 가운데 석진이 재빨리 선수 쳤다. 난 마라핫 좋던데 그거 시켜. 아무 생각 없이 주문책자를 뒤적이던 정국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석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정국아."

"네?"

"먹을 걸 준다고 해서 다 좋은 사람은 아니야. 알겠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을 온 얼굴로 표현하는 정국이 석진은 새삼 걱정스러워졌다. 아 물론 내 친구가 어린애 잡아다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는 파렴치한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물정이라곤 몰라 보이는 이 쪼끄만 꼬맹이의 미래 연애사에 혹여라도 오점을 남길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생각에 잠기던 정국은 자신 없이 우물거렸다.

 

 

"꼭 그런 건 아닌데."

"응?"

"윤기 형 친절하잖아요. 원래 그렇게 남들한테 다 잘해줘요?"

"아니."

"그럴 사람처럼 보여?"

 

 

호석이 코웃음 치며 끼어들자 지민이 뒤이어 팔짱을 꼈다. 아무한테나 안 그래. 우리 사장님은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을 대단히 신봉하는 사람이야. 기분이 묘해진 정국은 통통한 아랫입술을 꼭꼭 씹으며 지금까지의 상냥했던 윤기를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그랬구나. 하지만 나한테는 진짜 잘해 줬는데.

 

 

"되게 다정해서.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았어요."

 

 

형 진짜 착한데.

혼잣말로 웅얼거리는 것을 듣고 석진은 하핳,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어 버렸다. 민윤기 진짜 이런 건 엘티이 급이다. 얘 벌써 삼분의 일은 넘어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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