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는 여자
* 뷔국(TS)
"명절 존나 거지 같아."
―이제 와서?
"원래부터 별로였어."
저런, 큰 변화네.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 듯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다. 대체로 충실하다 못해 듣는 사람이 외려 낯부끄러워지는 반응을 보여주던 애 치고는, 심심한 대꾸였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아예 핑계 대고 빠져나오라고 했잖아. 아차 싶은 순간 땀이 밴 손바닥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졌다. 뺨을 스친 액정에 희뿌연 화장품 자국이 남는다. 망할. 전화가 꺼질까 봐 닦지도 못하고 찜찜하게 내려다보는데 침묵을 달가워하지 않는 김태은이 다시 내 말꼬리를 잡는다. 오늘 기분 왜 별로야?
"그냥. 부산 오기 전부터 집안 분위기도 개판이었고. 언니가 학원수업 때문에 안 가겠다고 그래서 아빠 화내시고."
―그랬구나.
"올 때마다 일은 쌓여 있고. 상어고기 굽는 냄새 너무 역겨워. 옷이랑 머리에 다 배. 짜증나."
―그거 되게 비리지.
"응. 친척들은 볼 때마다 남친 얘기만 하고. 나 보면 할 얘기가 그런 것밖에 없나 봐. 듣기 싫어."
―짜증날 만하네.
바람이 잔뜩 들어간 웃음소리. 문자로 치면 정직하게 흐,흐,흐, 세 음절로 끝날 만큼 멋이 없다. 신호가 바뀌는 텀이 생각보다 길었다.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남자 둘이 머리 위에 빨간불을 고스란히 두고, 후다닥 사차선의 길을 뛰어 건넌다. 죄 지은 양 서둘러 사라지는 뒷모습들을 눈으로만 쫓았다. 57번 버스가 오려면. 앞으로 십 분.
"생리까지 겹쳤어. 죽을 거 같아."
―너 생리통 심하잖아. 못 나오는 거 아냐?
"벌써 나왔어."
아. 김태은의 덜 떨어진 단말마를, 지나가던 택시의 클락슨이 무참하게 짓밟는다. 첫 날이라서 좀 덜해. 괜찮아. 한 손으로 아랫배를 슬슬 매만지며 말했다. 묵직한 풍선을 감싸안듯 손바닥을 안으로 둥글게 구부리고. 김태은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잠시 대꾸가 없다. 이제 막 버스를 타는지 엔진의 김 새는 소리가 식식거리며 수화구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럼 만나자.
57번 버스가 잠시 후 도착할 예정입니다. 전화를 끊고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는데 그새 메시지 한 통이 더 왔다. 남친 이름이다. 확인하기 전에 카드부터 먼저 찍는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대라 그런지 군데군데 빈 자리가 있었다. 핸드폰 액정에 하얗게 진 화장품 줄무늬를 손바닥으로 비벼 닦는다. 다 지워지지 않는 미세한 선들이 액정 위에 세로금을 긋고, 썩 달갑지 않은 글자들을 먼지낀 듯 지저분하게 만든다.
죽어 버렸으면. 하도 익숙한 저주라서 이제 별다른 효력도 없지 싶다. 그래도 죽었으면. 귀성길 차량 추돌사고처럼 흔한 사유라도 괜찮으니. 아니면 떡이나 전 따위를 먹다가 목이 막혀 질식사하는, 같잖고 우스꽝스런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내가 저를 한껏 미워하고 있을 때 좀 죽어 줬으면. 이토록 잔인한 저주가 입에 붙은 지 오래인데도 아직 남자친구라는 저장명이 바뀌지 않은 것을 보면, 나도 어지간히 미련맞다.
아니면 벌써 포기했거나.
이렇게 내 속이 꼬인 것을 알면 김태은은 뭐라고 할까. 그리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헤어지라는 친구다운 충고조차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말은 없어지겠지만, 그 떠들기 좋아하는 애가. 내가 대화 도중에 가끔씩 멍 때리는 것도 못마땅해 하던 애다. 나와 공유하는 일분 일초가 아까워서 아등바등하고 어떻게든 지나간 시간 끄트머리를 필사적으로 붙들어 보려 기를 쓰는 애다. 그럼에도 항상 약속 시간에 늦는 버릇이 있다.
일 분.
오 분.
칠 분 늦었다. 사람들 틈바귀를 헤치고 달려오는 길쭉길쭉 마른 몸. 일년에 서너 번 볼까 말까 하는 얼굴이니 그새 뭐가 바뀌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래도 나는 매번 틀린 그림 찾기처럼 열심히 일전과 달라진 것을 찾는다. 봄에 봤을 땐 얌전한 흑갈색이었던 머리가 아주 조금 짧아졌다. 거의 허리까지 왔었는데. 이제는 휘황찬란한 빨간색이다.
"짜잔."
자랑스레 웃으며 내 코앞에 대고 편의점 비닐봉투를 흔든다.
"양 많을까 봐."
네가 맨날 쓰는 걸로 사 왔어. 까만 봉지 안에 바디피트 대형 한 봉투가 들어 있다. 거 참 섬세하시네. 나는 오늘 처음으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볼 때마다 김태은은 좋은 의미로 좀 미친 것 같다. 비단 머리색깔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고. 여하튼 교복 입을 때부터 그랬으니 벌써 몇 년 째인데 이쯤 되면 얘가 그냥 평범한 스테레오 타입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시절엔 머리칼만큼은 얌전했다. 결도 참 좋았었는데. 대학 들어가고 나서 보라색, 주황색, 심지어 녹색으로 부분염색까지 하더니 머리카락 끝이 푸석푸석하게 갈라지고 말았다. 손톱으로 누르니 톡톡 끊어진다. 손금을 따라 부스러기가 쌓였다.
"머리 개털 다 됐네."
"색깔 안 예뻐?"
"예뻐. 근데 좀 쪽팔린다. 다 쳐다봐서."
워낙 범상치 않은 색깔이라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은 다 돌아보고 간다. 뭐 어때. 김태은은 머리카락 토막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내 손을 힘차게 붙들었다. 내가 생리대 봉투를 달랑거리며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맥없이 딸려오도록 내버려둔다. 길고 예쁜 손가락 끝에 진줏빛으로 두껍게 액을 발라 놓았다. 앞으로 몇 시간 동안 나를 빌려갈 손이다.
"단 거 안 땡겨?"
"땡겨."
"케이크 먹을래?"
나 잘하는 데 알아. 너 오면 데려가려고 찾아뒀어.
평소에는 서늘한데 나와 맞붙어 있으면 금세 땀이 차는 신기한 손이다.
"내가 이해가 안 된대."
"왜?"
"일년에 기껏해야 두세 번인데 가서 일 좀 해주는 게 뭐가 어렵냐고."
"으음."
"어차피 자기랑 결혼하면 똑같이 해줘야 할 일인데 그 때도 싫어할 거냐고."
김칫국 처마시고 있네. 김태은은 포크로 자기 몫의 케이크 속에서 딸기를 골라냈다. 와이프가 대리효도 해주는 사람이야? 병신 같은 새끼. 내가 하고 싶었던 욕까지 시원스레 대신 해 준다. 나는 신발을 벗고 쿠션이 푹신한 의자에 두 발을 올려 양반다리를 만들었다. 이상고온 때문에 아직도 날씨가 덥다. 카페 안에는 에어컨 냉기가 짱짱했다. 추워? 김태은이 카디건을 벗어 내밀었다.
"너 그 새끼랑 결혼하겠다고 말한 적 있어?"
"없어."
"근데 왜 혼자 지랄이야. 웃기네."
"그러게."
누나도 있으면서 생리통을 이해 못 하는 새끼한테 내가 뭘 기대해서. 나는 치즈케잌의 단단한 부분을 포크로 쪼개며 웃는다. 마땅히 지을 표정이 없어서 그냥 웃는 것이다. 김태은은 그런 나를 아주 유심히 살펴본다.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이 참에 실컷 봐둬라 싶은 마음에 그 끈질긴 시선을 내버려두었다.
99가지를 잘해도 한 가지를 못 해주면 그것 때문에 똥차가 되는 거라더라. 자칭타칭 연애박사인 박지민이 그랬다. 내 경우에는, 사실 한 가지에 국한된 게 아니었다. 그러니 남차친구라는 놈도 이미 오래 전부터 똥차도 아닌 리어카 수준으로 전락했지만, 뭐 아무튼.
그냥 욕을 좀 실컷 하겠다. 김태은도 앞에 있으니까. 김태은은 내가 예쁜 말만 골라쓰는 것보다 걸쭉한 욕 한 사발을 쏟아내는 것을 더 기꺼워했다. 그게 훨씬 나답다고. 이상한 취향이다. 그러니까 그냥 이 김에 묵혀둔 욕이나 풀어내야겠다. 그 씨발놈, 이제 남자친구라 부르기도 열받고 호칭만 봐서는 조만간 쫑내기 일보직전인 그 놈은, 땀이 많아도 속은 차가운 내 체질조차 곱게 보고 넘어가지 못하는 새끼다. 더위추위에 약한 건 둘째치고 한 달에 한 번씩 얼마나 뾰족한 고통에 꿰뚫리는지도 이해를 못 한다.
그게 그렇게 아파? 난 솔직히 너 하는 거 보면 다 꾀병 같아. 우리 누나는 안 그러던데. 기어이 1주년 기념일 저녁에 미리 예약해 둔 레스토랑 테이블 앞에서 그딴 소리를 들었던 날. 한 마디도 아니고 연속해서 삼타를 날린 놈은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머리도 표정도 하얗게 비운 채 물잔을 쥐었다 놓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김태은이 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을 달려 모처럼 상경했던 날도 그 날이었는데, 나는 반도 못 먹은 음식과 선물을 고스란히 두고 가방만 챙겨 뛰쳐나올 때까지도 김태은에게 연락할 생각은 꿈도 못 꾸고 있었다. 화가 나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눈앞이 뿌얬다. 엘리베이터는 다행스럽게도 같은 층에 서 있었다. 일층 버튼을 누르는데 남자친구가 헐레벌떡 뒤쫓아 나왔다. 정아야, 왜 그래? 대답 대신 닫힘 버튼을 강박증 걸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눌러댔다. 얼뜨기 같은 면전에 대고 문이 닫혔다.
그리고 아픈 배. 가시돋친 풍선 같은 통증과 답 없는 남친새끼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김태은이라는 삼박자를 고루 갖춘 날. 죽고 싶었다. 연애고 친구고 뭐고, 달려오는 저 택시 앞으로 뛰어들어서. 하지만 그 택시에서는 김태은이 내렸다. 그 때는 아직 물들이지 않아 다크초콜릿 빛깔이었던 긴 머리를 휘날리며. 빵빵한 배를 붙잡고 웅크려 앉아 있는 내 앞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원래도 감정이 북받치면 눈물부터 짜는 편이다. 게다가 김태은은 내 수도꼭지를 잠글 줄은 모르고 한껏 열어놓기만 한다. 정아야. 울지 마 정아야. 그 새끼 지금 쫓아가서 죽여버릴까? 그러지도 못할 거면서, 그런 소리를 했다. 길가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하나는 울고 하나는 달래느라 급급한 두 여자라니. 체면 차릴 줄도 모르고 흐득흐득 눈물콧물을 쏙 빼는 나를 김태은은 침통한 표정으로 끌어안았다.
늦지 좀 말지. 매번. 중요한 순간에조차. 멍청한 변명이지만, 나는 늘 그렇게 생각만 할 뿐이다.
수능을 치고 대학 합격 결과가 나오자마자 짐을 쌌다. 온 가족이 모두. 약간 급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붙으면서 아버지 직장도 갑작스레 수도권 본사로 올라간 까닭에 이사 문제는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바다도 못 보고 사투리도 안 쓰고 친구도 없고, 김태은도 없는 곳. 나는 김태은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떠나기 이틀 전에야 겨우 동네 놀이터에서 사정을 알렸다. 그 추운 겨울에 하드를 깨물어 먹고 있던 김태은의 입에서 아이스크림이 뚝 떨어졌다. 펑펑 쏟아지는 입김에 가려 휘둥그레 치뜬 태은의 눈이 약간 흐려 보였다.
그래도 김태은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나더러 이제 부산 촌년 신세를 못 벗어날 거라고 했다. 개구진 목소리였지만 억지로 짜낸 티가 다 났다. 제 딴에는 나를 놀려서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훌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에 있는 대학에 붙은 김태은은 나를 따라 올라올 일이 없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교통비는 터무니없이 비쌌고 신입생인 우리는 둘 다 바빴다. 매일같이 붙어다니던 사이가 일년에 서너 번, 명절에만 겨우 볼까 말까 하는 사이로 전락해도 김태은은 여전히 내게 지극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주는 애였다. 걔가 내 앞에서 나 때문에 표정을 굳힌 것은 딱 한 번밖에 없다. 입학 후 첫 여름방학 때, 반 년만에 만난 내가 다짜고짜 첫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선언했을 때였고.
아니다. 한 번이 더 있구나. 그건 첫 남친 선언으로부터 반 년이 더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CC가 겪을 수 있는 악수(惡手)란 악수를 전부 겪고 지쳐버린 내가 울며불며 예고도 없이 부산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친구들과 술 먹다 부산역까지 뛰쳐나온 김태은의 입김으로 겨울밤이 하얗게 빛 바랬을 때.
왜 이렇게 울어. 헤어졌어?
내 울음이 그칠 때까지 뺨을 문질러 주던 태은의 질문에 고개를 젓는데 때맞추어 버스가 왔다. 갈 데가 없었던 나는 냉큼 태은의 집으로 향하는 그 버스에 먼저 올라서 두 사람분의 카드를 찍어 버리고. 그래서 내 성의없는 대답에 태은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도 미처 보지 못했다.
못 본 게 있기는 할까? 꽤 많을 것이다. 어떤 시점에서부터 나는 김태은이 나에게 조금씩 말을 아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을 내리깔거나 입술을 깨물거나 급조된 미소 같은 짤막한 징조들을 통해서. 나는 묻지 않고 김태은은 말하지 않는다. 내가 꼭 알아야 할 것이라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아니면, 평생 모르거나.
그래도 아직은 서울보다 부산이 좋다. 딱히 고향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엔 애매한 여러가지 면에서.
"이번 겨울엔 서울 안 올라와?"
고등학교 때에는 아메리카노 따위 절대 먹지 않았는데. 냄새만 좋고 맛은 더럽게 쓴 물을 마시느니 차라리 코코아를 삼천원 주고 사먹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나는 차갑든 뜨겁든 가리지 않는 아메리카노 마니아가 되었다. 내 질문에 김태은은 잠깐 생각해 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꼴에 생각이라는 걸 하나 보다. 내 말만 들으면 입석이라도 구해서 후다닥 달려올 것처럼 구는 주제에.
"아마 못 갈걸. 나 이번에 학회활동 끝나면……설 지내구 바로 독일 가."
……아. 이제는 내 입에서 얼빠진 단말마가 흘러나온다.
"장학생 붙었어."
공부 열심히 한다더니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태은은 말맺음과 동시에 내 눈치를 살핀다. 나는 아직 뜨거운 아메리카노 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웃는다.
"잘됐네."
김태은은 알맹이 없는 내 미소를 보고 따라 웃었다. 두부처럼 네모진 입매로.
"설에 다시 보자."
"응."
"상어고기 굽다가 질리면 말해. 내가 바로 뛰어나와 줄게."
"……그냥 우리 집 와서 나 대신 일 좀 해주면 안돼?"
"그럴까?"
김태은의 웃음은 언제나 속이 꽉 차 있다. 보고 있으면 따뜻한 음식을 배불리 먹은 것처럼 뿌듯해진다. 굳이 채우지 않아도 될 순간에조차 저렇게 웃어 보인다는 게 얼마나 적잖은 노력의 산물일까 싶어 나도 그냥 따라 웃었다. 김태은처럼 단단하고 야무지게는 못해도.
남자 하나 잘못 만나서 구질구질한 짓을 일삼는 내게도 인복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김태은을 만나는 데 몰빵했을 것이다. 이런 친구는 또 없겠지. 생리대를 까만 봉다리에 사다 주고 남친의 쓰레기짓을 구구절절히 들어주고 기꺼이 욕도 해 주고 몇 번 안 되는 만남마다 나를 놀라게 해주려 머리와 화장을 바꾸고, 그 몇 시간을 위해 몇 달씩을 기꺼이 기다리는. 그런 부류의 친구임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최악의 기억으로 전락해서 칼로 파내 버리고 싶었던 1주년 기념일. 우는 나를 달래서 함께 자취방으로 들어온 김태은은 내 핸드폰 배터리를 기어코 분리시켜 구석에 처박았다. 전화 안 받아도 돼. 꼴보기 싫으면 안 보는 게 나아. 드물게도 단호한 말투였다. 나는 눈이 퉁퉁 부은 채 반항할 의지 하나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 동안 김태은의 캐리어에서는 무언가가 자꾸자꾸 나왔다. 내 선물로 샀다는 새 모자와 오르골이 나오고 초콜릿 상자가 나오고 적갈색 기모주머니에 싼 온돌도 나왔다.
배를 따뜻하게 해야지. 너 속 차잖아. 이거 안고 있으면 효과 좋다며. 고등학교 때 너 맨날 나한테 이거 빌려서 안고 있었던 거 기억 나?
안 날 리가 없다. 얼굴 보는 일이 뜸해질수록 되레 색조가 선명해지는 우리 기억의 자화상. 김태은의 명제는 내게도 똑같이 작용한다. 나는 김태은이 멋대로 리폼했던 교복 카디건의 단추 색깔이 흰색이고 거기에 빨간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마주보고 있으니 어김없이 맥락을 무시하고 떠오르는 그날 밤 김태은의 얼굴. 그 때 김태은은 평소처럼 내가 훌쩍임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다가, 오랜 망설임 끝에 처음으로 ……그냥 헤어지면 안 돼? 라고 물었다.
"추석인데 어떻게 다들 영화관에 가는 거지?"
자리가 하나도 없어. 핸드폰을 한참 끼적이더니 불쑥 저런다. 영화 보고 싶다는 말도 한 적 없는데. 날 만나면 이벤트는 모조리 제 역할인 줄 아는 김태은.
"영화 안 봐도 돼."
"그럼 뭐 할까?"
"그냥 여기 있을래."
어딜 돌아다니기엔 허리가 좀 아프다. 김태은은 내 말에 얌전히 핸드폰을 테이블 위로 뒤집어 놓는다. 붕붕붕. 대신 내 핸드폰이 끊임없이 혼자서 몸을 떨며 발광한다. 까만 액정에 피어나는 메시지 박스를 곁눈질한 김태은이 말했다.
"인기 좋네. 계속 다른 사람한테서 카톡 와."
"귀찮은데."
"친구 많구나."
왜 그렇게 낯선 표정을.
"하기야, 금세 적응할 거라고 생각했어."
거짓말, 부산 촌년 될 거라고 놀렸으면서. 하지만 나는 정말로 빨리 적응했다. 서울내기들 사이에서 낯선 표준말과 대학생활에 적응하느라 매일같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김태은이 걱정 반 진심 반을 담아 놀리던 것과 달리 사투리가 흉이 된 적도 없었다. 나 말고도 각 지방의 독특한 말씨를 구사하던 애들은 많았으니까. 오히려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는 득점요소가 되었다. 예를 들면 미팅 자리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확립한다던가. 그리고 주목. 정아야, 오빠야 라고 한 번만 해봐. 나는 부산애들 그러는 게 제일 귀엽더라.
누가 너더러 귀여워하라고 이런 말투 쓰는 줄 아나. 하지만 지금의 남자친구도 그들과 비슷한 수법으로 접근했었다. 상투적이고 진부했다. 월등한 것은 얼굴 뿐이었다. 쌍꺼풀 없이도 크고 좌우가 긴 눈, 그림자가 몇 겹씩 지는 우뚝한 콧대, 골짜기마냥 선명한 인중과 입술산,
"오늘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해?"
인정하기 싫은데 자꾸 입가가 네모지게 벌어지는 웃음을 기다리게 만드는 그 얼굴이,
"어."
"조금 늦으면 혼나?"
"혼나."
많이 닮았구나. 김태은이랑.
아니 그딴 새끼 얼굴에 자꾸 김태은 얼굴을 비춰보긴 싫은데. 세상은 참 뜬금없는 면에서 뜬금없는 방식으로 불공평해서, 내 맘대로 굴러가 주질 않아서.
김태은은 다시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이유는 본인도 알 것이다. 점점 짧아지는 대답이나 새침해지는 눈빛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배신감.
아무리 오랫동안 못 만나도 얼굴 보는 순간 그 동안의 공백이 뭉텅 잘려나가는 친구가 있다. 김태은이 내게 그랬다. 백년을 못 만나도 단 하루가 주어진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 애와 예전의 익숙하고 시끄러운 사이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너조차 멀리 가버린다는 얘기는 한 번도 안 했었잖아. 아니 했던가. 전공이 전공이니만큼 한 번쯤은 나갔다 오는 게 좋다는 얘기를 네가 저번 설에 했던가 아니면 작년 추석 때 했던가.
"……정아야."
"……."
"화났어?"
"내가 왜?"
김태은은 내 말에 도리어 아차 싶은 표정이 된다. 이윽고 그 난감한 얼굴은 자기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어하는 표정으로 바뀐다. 나는 태은더러 저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나의 못된 이중성이 싫었다.
내년 설에 보자.
아니면 올 겨울에 보던가.
원래는 이런 인사를 건네려고 했다. 으레 하던 대로. 그런데 다 실패다. 김태은이 그 때쯤엔 아예 남의 나라 땅을 밟고 남의 나라 공기를 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내내 웃으며 농을 걸던 김태은은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다물었다. 끊임없이 나를 흘끔거리고 있는 게 느껴져도 모른 척했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써 주기엔 내가 지금, 너무, 힘들었다.
집으로 가는 57번 버스. 앞으로 4분. 저걸 그냥 보낼까. 막차도 아닌데. 침묵 속에서 수차례 번뇌한다. 김태은은 이런 고민을 하는 날 아는지 모르는지 손가락만 꼬물거린다. 그러다 슬며시 내 오른손을 잡아 꼭 쥐었다. 걔가 나를 달래는 흔한 방식들 중 하나였다.
또 한 번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붕붕거린다. 이걸 저 차도에 던져서 박살내 버릴까. 신경이 방금 깎은 연필심 끄트머리처럼 뾰족하게 코를 세웠다.
"시험 끝나면 내가 서울 올라갈게."
"아냐. 바쁘면 오지 마."
단칼에 말이 잘린 김태은은 반박 대신 내 손을 쥔 손에 힘을 준다. 아프지 않을 만큼만.
나는 김태은의 지극정성을 새삼 상기한다. 그 굳건한 배려가 사라질 때 내가 느낄 공백이 얼마나 어마어마할지도. 누군가에게 챙김 받는 것을 떠올릴 때 정작 남친보다 김태은이 더 많이 떠오른다면 이건 문제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퍼다주면 역으로 돌아오는 게 있기를 바랄 법도 한데, 김태은은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보살의 현신인가.
버스가 도착하기까지 이제 3분. 수어 개의 헤드라이트가 차도의 쉐브론 무늬 위로 빗금을 마구 그어댄다. 옆에서는 우리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커플이 끈끈이처럼 찰싹 달라붙어 서로를 향한 절절한 사랑을 음미하느라 여념이 없다. 곁눈질을 했다. 여자는, 이런 평가를 함부로 하면 안 되지만, 김태은보다 훨씬 못생겼다.
김태은은 연애를 안 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대학 들어와서 남친 사귀고 있다는 소리를 한 번도 못 들어 봤다. 김태은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는 교복 입고 떡볶이 나눠먹던 시절부터 하도 많이 봐와서 너무 잘 알고 있다. 요구하지도 않은 선물과 편지가 조공처럼 들어오는데도 그 잘난 애가 연애를 안 하는 까닭을 나는 모르는 게……아니구나. 몰라서는 안 되는구나.
정아야. 가라앉은 김태은의 목소리가 오른쪽 귀를 찔렀다. 돌아보지 않는다. 시간이 좀 필요했다. 표정을 추스를 시간이.
"정아야. 나는……."
"……."
"내가 또 늦은 거야?"
내 손등 위로 김태은의 손바닥에 고인 습기가 옮겨 묻는다.
"안 늦으려고 매번 노력을 하는데."
"……."
"그게……잘 안 되더라."
나도 속 터져. 김태은이 웃으며 덧붙이는 말을 나는 조용히 곱씹는다. 왕왕 울리는 소음 가운데 싱겁게 눈길을 떨군 김태은이 빨간색 뒤통수를 헝클어뜨린다. 다시 곁눈질해도 정수리만 보여주니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빨간 커튼처럼 드리운 머리카락 아래로 기어나오는 소리가 너무 작아서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1년만."
사실 김태은이 저렇게 죄인처럼 고개도 못 들고 웅얼거릴 필요는 전혀 없다. 얘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태은의 독백이 막힐까 봐 아무 말 못하고 온 청각을 곤두세운 채 듣기만 듣는다.
"1년만 있으면 올 거니까. 어차피 한국에 있어도 4번 정도밖에 못 만나는데."
맞는 말이지만 그 네 번의 놓친 시간은 대체 누가 보상해 줄 건데.
김태은이 뒷말을 다 잇기도 전에 버스가 왔다. 새파란 버스. 고등학교 때에도 서면에 놀러오면 반드시 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김태은은 우리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 줬다. 그리고 반대편 정류장에서 다른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을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태은이 지켜보고만 있고, 나는 혼자 지갑을 뒤져 카드를 찾는다.
올 때와 달리 빈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의미 없이 달라붙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창 쪽을 보고 섰다.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내 모습에, 차창 안을 살피던 김태은이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다. 자리 없어? 다급히 벙긋거리는 입모양. 금세 걱정이 차오르는 눈. 차라리 처음부터 너와…….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면 새빨간 거짓말일 것이다. 남친이 생겼다는 내 말을 듣고 무언가 잃어버린 눈을 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마모되어 무덤덤해지는 김태은을 볼 때마다. 여러 번 생각했다. 솔직히. 내 친구는 내 남친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섬세하고, 아직도 나와 손을 잡으면 손바닥이 축축해질 만큼 긴장하고, 내가 부르면 자다가도 뛰쳐나오며, 내가 울면 속이 상해 아랫입술 껍질이 몽땅 뜯겨나가는 그런 애다. 그런데 왜.
태은아.
너는 왜 이번에도 늦어서.
버스가 휙 움직인다. 휘청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는데 핸드폰이 덜덜 떤다. 차곡차곡 쌓인 남친의 메시지와 전화 위로 김태은이 말한다. 정아야. 그 뒤로 무슨 말이 이어질지 뻔히 보이는 나는 아무 말 없이 화면을 꺼 버리고. 그래도 김태은은 계속해서 붕붕거리는 진동으로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 애쓴다. 이미 한참 늦어 버린 속내를 돌려돌려 말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진 김태은은 제법 오랫동안 말 위에 다시 말들을 켜켜이 쌓는다. 나는 읽지도 못하는데.
내년 설에는 그냥 부산에 오지 말까.
흐린 시야를 비벼 닦으며 문득 생각한다. 고작 일년의 공백 때문에 벌써부터 이렇게 약해지는 나는 실은 태은보다 얼마나 늦은 것일까. 얼마나, 얼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