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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번견(番犬) 1

w. 로

* 랩국

 

 

 

 

  얇은 서류 몇 장이 든 종이봉투를 들고 수금 준비를 하는 나에게 H는 몇 가지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흥미란 어디까지나 그의 기준이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시덥잖은 잡담들 중 유일하게 내 관심을 붙든 것이 있었다.

 

 

"네가 지금 깽판치러 가는 그 집에 말야. 한국인 애가 있어."

"……."

"RM 네 또래야. 남자애."

 

 

그 무렵의 나는 허깨비 같은 상상 속의 존재보다 실제로 말을 하고 움직이며 같은 숨을 쉬는 현실의 누군가가 절실했었다. 절실했다고 단정하는 까닭은, 내가 열여섯 살이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 사이에 파묻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도 모자랐을 나이였기에.

 

시커먼 옷과 총기로 무장한 사내들만 오가는 거대한 저택에서, 내 유일한 말상대는 그 때까지도 H가 전부였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는 완벽한 말상대라 칭하기에는 여러 모로 턱없이 부족했다. 주로 그가 하릴없이 늘어져 있는 내 방을 찾아와 일방적으로 떠들고, 나는 아무 대꾸도 반응도 없이 그의 주절거림을 흘려 버리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가끔 내 방문을 타고 넘어가 온 저택을 울릴 만큼 쩌렁쩌렁했던 H는 나의 시건방진 무관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역시 그런 식으로 어떤 욕구를 소화시키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이를 테면 비린 체취를 풍기는 코쟁이들의 땅에서 한국어로 자유로이 떠들 수 있는 유일무이한 시간 같은 것들을. 그렇다면 청자의 의지나 태도 따위는 애당초 고려의 대상 축에도 못 끼었을 테다. 그럼에도 그는 아주 가끔씩 아쉬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네가 서너 살만 더 나이가 많았어도, 하고.

 

글쎄. 그것이야말로 내가 뒤로 애써 삼키고 있던 소리였는데 말이다.

 

나는 평소에도 말수가 적은 편이었고, 떠들기보다 차라리 들어주는 쪽을 택했지만, 홀로 견디는 정적에는 한계치가 따를 수밖에 없다.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서로 눈만 지그시 마주한 채 몇 시간을 말없이 버티라 해도 만족했을 것이다. 난데없이 하늘에서 툭 떨어진 '내 또래의 사내애'가 가진 비중은 내게 그토록 묵직했다. 거울을 보며 H와 나의 생김새를 멋대로 조합해 그려낸 상상 속의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

 

봉투 주둥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나는 오늘 처음으로 H의 눈을 마주 보았다. 칼을 다루느라 굳은살이 덕지덕지 박힌 손과 썩 어울리지 않는 예쁜 눈. 그는 자신의 말이 내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그 눈으로 몸소 지켜보는 중이었다. 기분 좋게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그 집 식솔도 뭣도 아니고 그냥 애완견 같은 거야. 노친네가 나이를 처먹더니 변태적인 취향만 늘어서……."

"……."

"그런 건 살려서 데려와도 좋아. 네가 관리만 잘 할 수 있다면."

"……."

"혹시 알아? 나중에 어떻게 써먹게 될지."

 

 

H는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둔 리볼버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애완견? 저속한 표현에 의식적으로 밀려오는 불쾌감이 내 얼굴을 덮었다. H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에는 미묘한 위화가 있었다. 나는 그가 이런 이야기를 흘려주는 저의가 궁금해졌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복잡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 서둘러 품 안으로 권총을 밀어넣었다. H가 복도로 나서는 내 등에 대고 외쳤다.

 

 

"보스가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했을 거 아냐."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구원자의 위치와 역할에는 걸맞지 않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니 애써서라도 잘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잘못된 이야기를 각색하지 않도록. 우리가 처음 서로를 마주했던 순간 이후로, 아니 어쩌면 서로를 일절 모르고 살아왔던 그 전의 인생에서도 나는 한 번도 너보다 키가 작았던 적이 없었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여지 없는 사실이겠지. 우리가 첫 만남을 가졌던 그 냄새나는 골방 구석에서조차 나는 너보다 한 뼘 이상으로 키도 덩치도 더 컸다. 당시의 너는 못 먹고 시달린 탓에 꼬챙이처럼 야위어 있었으니까. 그 가여운 모습이 뇌리에 지나치게 선명한 나는, 그래서 네가 이렇게 크고 훌륭하게 자랄 수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평생 내 팔 아래 그늘에서만 자라야 할 줄 알았지.

 

나 역시 겨우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한 열여섯 살의 사내아이에 불과했다. 또래보다 키도 체격도 훌륭했지만 얼굴과 귓불에 보송한 솜털이 일렁이는 어린애. 한창 보스의 수하에서 이런저런 가르침을 받으며, 잡일을 넘어 조직 내부의 깊숙한 곳까지 천천히 파고들어갈 무렵이었다. 그 시절은 융화의 기간이었다. 보스의 무거운 신뢰에 기반한.

 

조직에게서 막대한 자금을 끌어다 썼던 파산 직전의 어느 졸부에게 최후통첩을 전하러 가던 날이 있었다. 나는 칼라깃을 목 끝까지 세운 두툼한 재킷 차림이었다. 날이 좀 찼던 것으로 기억된다. 네 이야기를 들려주며 실실 웃던 H의 잘 다려진 셔츠깃도 두꺼운 재질로 빳빳하게 서 있었다. 썩 유쾌하지 못한 일을 하러 가는 날에 걸맞는 음산한 날씨였다. H의 차에 실려 그 집을 찾아가는 내내, 아스팔트를 들이부은 빛깔의 하늘이 보기 싫었다.

 

H는 일을 하러 저택 밖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내 방에서 떠드는 것과는 판이하게, 오로지 필요한 말만 짧게 건네고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는 눈동자를 움직였다. 부드럽게 눈꼬리가 휘어진 그 눈이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했다. 나는 예전부터 H의 단 한 가지 부러워할 만한 점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낯선 저택 앞에 차를 세우고 나를 내려주는 그 순간까지도 묵언수행자처럼 행동했다. 시동을 끄는 그와 문을 열고 내리는 내 눈이 사이드 미러 위에서 잠깐 마주쳤다. 나는 금세 시선을 돌렸다. 찰나에 H의 눈매가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보스의 이름 하나에 대저택의 육중한 문은 손쉽게 열렸다. 내 발자국이 인적 없는 안뜰을 반으로 갈랐다. 한때는 사람들의 활기와 웃음소리로 점철되던 시절이 있었을 거대한 석재 건물이 칙칙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하인조차 몇 남지 않은 마당에 그 규모를 감당치 못해서 온 집안에 을씨년스러운 냉기가 차고 넘쳤다. 나는 실내용 슬리퍼가 벗겨진 채 허둥지둥 뛰쳐나온 집주인의 두툼한 콧대 앞으로 구색만 갖춘 얄팍한 서류봉투를 들이밀었다. 조금도 웃지 않고서. 무표정은 가장 쉽고 편리하며 동시에 위압적인 수단이었다. 그는 자신의 반 푼도 채 살지 못한 어린애 앞에서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보스가 보냈습니다."

"……."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그러더군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를 조금이라도 안다 싶은 이들에게는 빼놓지 않고 똑같은 소리를 듣지만, 나는 정말로 매정하리만치 감정에 인색한 인간이었다. 보스가 나를 처음 울타리 안에 들이던 날에도 나는 그저 크고 건장한 그의 풍채를 물끄러미 올려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 했다―H는 이 이야기를 들먹이면서 즐겁게 웃어댔었다. 그래서 나는 좋고 싫음이 기가 막히게 뚜렷한 네가 참 부러울 때가 많았는데, 이런 부차적인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고.

 

두껍게 쌓인 먼지 같은 얼굴로 나는 통보를 전했다. 몰락한 중년의 갑부는 얼이 빠져 있었으므로 내가 그의 면전에다 대고 봉투를 거칠게 몇 번 흔들어야 했다. 그는 황급히 그것을 받아들고 비틀거리며 안으로 사라졌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는데, 두꺼운 입술 안에서 짓씹힌 소리는 바깥에서 넘어오는 바람소리보다도 못했다. 실내임에도 야외 못지 않게 싸늘한 공기에 나는 재킷을 여몄다. 내가 그리 느꼈거늘 너는 얼마나 추웠을지. 사람 사는 냄새라곤 손톱만큼도 나지 않던 거대한 감옥 같은 집에서.

 

실은 그 남자가 나를 맞이하러 황급히 기어나오지 않았더라면 너를 발견하게 될 경위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빠져나온 작은 지하실 입구에 나는 흥미를 느꼈다. 아니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오늘 이 집에서 해야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늙은 졸부는 죽여도 그만, 살려도 그만이었다. 보스는 이용가치가 떨어진 사냥개의 처분에 관해서 나에게 자율권을 주었다. 성인식을 맞은 아이에게 꽃과 향수를 안겨 주듯이.

 

나는 짜맞춘 퍼즐처럼 H가 아침에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국인 사내아이를 사들여 개처럼 사육하는 더러운 취향의 노친네. 이 집안에 감도는 모든 한기의 구심점으로 보이는 시커먼 지하실 계단. 그리고 집주인의 흰 셔츠 소매와 앞섶에는 점점이 튄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스치는 시선으로 분명히 그것을 보았다.

 

망설이지 않고 입구로 들어가 축축한 계단을 따라서 내려갔다. 뚝 잘리다시피 끊기는 층계의 끝은 굳게 닫힌 문이었다. 나는 품 안에서 리볼버를 꺼내 들고, 눈앞에 펼쳐질 광경을 어렴풋이 상상하면서 심호흡흘 한 후, 차가운 문짝에 손끝을 댔다. 잠기지 않은 문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밀려났다.

 

 

"……."

 

 

왈칵 몰려오는 썩은내가 콧잔등을 찌푸리게 했다. 신물이 날 만큼 맡아온 피 냄새의 기억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오래 방치한 상처와 살이 한데 뭉크러져, 죽어가는 악취였다. 그 지독함은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열린 문으로 흘러들어온 어슴푸레한 빛이 전부인 지하실은 지나치게 추웠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영안실이 이런 분위기일까 싶었다.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문을 활짝 열어놓고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어스름 속에 파묻힌 둥그런 형체가 보였다. 나는 시야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두어 번 더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잘 들어라. 나는 너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부족한 내 모든 표현력을 동원해서, 그 때의 네 모습과 내 기분과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다시 한 번 끄집어내어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묘사가 이처럼 길어진다.

 

내 얕은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그 서늘한 어둠과 악취와 희끄무레한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 개연성이라곤 없는 것들이 전부 너 하나로 귀결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닭 모가지처럼 비쩍 말라서 길게 수그린 목과 새까만, 정말 새까만 머리카락, 앞으로 모인 양손, 낡은 족쇄, 그 족쇄 끝과 연결하여 벽에 고정시킨 쇠사슬,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하얀 빛을 내던 네 두 눈. 두 개의 눈.

 

 

"……FUCK."

 

 

당시의 나는 이미 슬래셔 무비 같은 광경에 무뎌질 대로 무뎌져 있었다. 목이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꼴을 보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네 모습은 H가 관리하는 사창가의 어린 창녀들이 포주에게 얻어터지고 늘어진 모습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강렬하게 뇌리를 후벼팠다. 너는 그렇게 야위고 비참하고 가여운 모습으로 내 세계에 떨어졌다. 경계심도 뭣도 없는 텅 빈 눈이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낯선 이가 권총을 들고 갑작스레 들이닥쳐도, 불분명한 시선은 어딘가 한 군데에만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순간 네가 눈이 멀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뒤통수가 징하게 울리는 충격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네 앞에 조심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뼈만 앙상한 두 손목을 감싼 굵직한 수갑 아래, 긁히고 찢긴 상처에서 지하실 안에 가득 찬 그 악취가 올라왔다. 자세히 보니 헐렁한 누더기 셔츠 아래의 목덜미와 손목, 하의를 걸치지 않아서 드러난 허벅지며 종아리 그리고 맨발까지 하나같이 크고 작은 상처투성이였다.

너는 그 순간 인간이라기보다 학대받은 작은 동물에 더 가까운 몰골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씹었다. 이목구비의 생김새, 물들이지 않은 흑발, 틀림없는 동양인.

 

 

"Coreano?"

 

 

그 질문은 확인사살에 더 가까웠다. 살집 없이 야윈 네 얼굴에서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우뚝하니 도드라진 콧날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척 크지만 기이하게 생기가 없는 눈동자였다. 네 눈은 깜빡이는 속도조차 남들보다 느렸다. 그리고 말이 없었다.

 

 

"한국인이야?"

 

 

H와 한국어로 수다를 떠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한 글자 한 글자가 입에 설었지만, 나는 최대한 또렷하게 발음에 무게를 실었다. 그러자 까맣게 가라앉아 있던 눈에 알전구가 켜지듯 빛이 들어왔다. 나는 울컥 올라오는 한숨을 삼켰다. H의 말이 흰소리가 아니었음을 증명받은 셈이다.

 

 

"저 남자가 널 데려왔어?"

 

 

짧고 미미한 고갯짓이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우리는 서로 꿈을 꾸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나는 응당 붙여야 할 모든 사족과 질문들을 목구멍 안으로 재빨리 쑤셔넣고,

 

 

"여기서 나가고 싶어?"

 

 

네가 더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목덜미의 생채기에서 피가 찔끔찔끔 배어나왔다. 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부위만 보아도 학대의 흔적이 다 셀 수 없을 만큼 즐비했다. 얼마나,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서 이러고 살았을지 나는 짐작도 제대로 못 하겠지. 실은 구역질이 났다. 내 인생도 썩 그럴싸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네 인생이야말로 정말 좆같았겠구나 싶어서. 그리고 그처럼 즉흥적인 결단은 짤막한 내 인생에서 손꼽힐 만큼 드물었다. 나는 고약한 냄새도 잊고 네게로 몸을 기울였다.

 

 

"잘 들어. 내가 너를 여기서 꺼내줄게. 나와 같이 가."

 

 

멀리서 집주인의 부산한 구둣발소리가 쟁쟁 울렸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겪지 않도록 해줄게. 대신 나를 도와줘. 내가 뭘 하든 철저하게 내 편이 돼서."

"……."

"밟히는 쪽이 아니라 밟는 쪽이 되도록 해줄 테니 그것만 약속해."

"……."

"나랑 같이 갈래?"

 

 

동면 상태에 가까웠던 네가 과연 그 말을 곧이 알아들었을지,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네가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빛을 받아 그렁이는 눈. 내 입술만 멍하니 바라보던 너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기름칠을 하지 않은 태엽인형처럼 움직임에서 쇳소리가 날 것 같았다. 그만하면 됐다.

 

 

"일 분만 기다려."

 

 

나는 문을 열어둔 채 계단을 도로 올라갔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아드레날린이 핏속으로 분출되자 호흡이 빨라지고 눈가에서 맥박이 가쁘게 펄떡거렸다. 내가 지하실로 향하는 통로에서 빠져나오자 때맞추어 남자가 모퉁이에서 허겁지겁 나타났다. 무언가 까맣게 적힌 종이 두 장을 들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그의 코앞까지 성큼성큼 다가가며 리볼버를 고쳐 쥐었다. 정 떨어지는 감촉의 쇳덩이가 새삼 손아귀에 뿌듯하게 들어찼다. 여전히 겁에 질려 있지만 비교적 혈색을 되찾고 무어라 말하려 하는 남자의 머리통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소음기를 장착한 리볼버에서 쉭, 하고 김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가까운 사정거리에서 총알은 제대로 명중했다. 미간에 뻥 뚫린 바람구멍과 부서진 뒤통수에서 피를 콸콸 쏟으며 남자는 뒤로 벌렁 넘어갔다. 차가운 바닥 위 퉁퉁한 몸이 푸들푸들 사지를 떨며 경련했다. 내가 만약 이 날, 이 시간에 들이닥치지 않았더라면 남자는 너에게 평소 하던 것처럼, 무슨 짓을 자행했을지.

 

시체의 사타구니에 대고 한 발을 더 쏘았다. 피가 사정없이 튀었다.

 

일 분이 아니라 오 분이라고 말하는 게 더 나았을걸.

 

나는 뒷처리를 위해 H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무리 작업은 늘 번거로웠고, 나는 내 스스로가 아직까지 못 미더웠다. H는 고분고분히 연락을 받고 저택으로 올라오겠다고 말했다. 지하실로 내려가자 너는 양손을 모은 채 인형처럼 가지런히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퀭한 눈이 아까와 달리 내 모습을 위아래로 정신없이 훑어 내렸다. 그나마 살아있는 티가 나니 한결 강아지 같은 눈이었다. 전신에 피를 흠뻑 묻힌 내 몰골이 무서웠을까. 턱 끝에 매달린 핏방울을 대충 문지르고, 벽에 박힌 쇠사슬을 총으로 쏘아서 끊어버렸다.

 

그렇지. 나는 그렇게 어린 나이에 이미 살인을 했다. 너를 위해서. 순전히 너를 위해서.

 

너는 아마 흔들리는 내 머리카락에서 희미한 화약 냄새와 더불어 죽음의 향취를 맡았을 것이다. 나는 수갑을 풀어주기 위해 고개를 네 가까이 기울였다.

 

 

"이름이 뭐야?"

"……."

"괜찮아. 그는 죽었어."

"……."

"이름이 뭐야?"

"……제이……"

"한국 이름은 없어?"

 

 

나는 'RM'이라는 두 글자를 평생 혐오했다. 혀를 억지로 굴리는 발음이 못 견디게 징그러웠다. 내 이름이면서도 한 번도 내 것인 적이 없었던 이상한 단어. 실은 그저 알파벳 두 개를 갖다붙인 것뿐인지라 이름이라 칭하기에도 조잡스러웠지만, 여하튼 한 번도 누군가의 입에서 제대로 불려본 적 없었던 낯선 모국의 본명에 집착하게 된 경위였다.

 

 

"없어?"

"……국……"

"……."

"정국."

 

 

잔뜩 쉬어서 갈라지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그럼에도 묘하게 깨끗한 음성이었다. 한 톨 바람처럼 잠깐 앉았다 가는 목소리. 곱씹고 또 곱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낡은 녹음기에서 새어나오는 듯 빛바랜 목소리에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그것은 말로 다하기 힘들 만큼 벅찬 순간이었던 것이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눈앞에서 열리고 있었다.

팔을 앞으로 내밀게 한 뒤 수갑 사이의 가는 사슬을 총으로 쏘아 끊어도 너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쩔그럭 소리와 함께 뼈만 남은 손목에서 족쇄가 떨어졌다. 오래된 멍이 창백한 피부에 누렇게 남아 있었다. 너는 아주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듯 자유로워진 양 손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 때 무슨 말을 했었지?

 

 

"……예쁜 이름이네."

 

 

아. 그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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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 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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