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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M

  그저께 재밌는 것을 보았다. 교수의 친구가 강의실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이번에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로써 네 번째의 '새로운' 친구가 등장한 셈이다. 


교수에게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찾아오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대개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지만 가끔씩 이렇게 낯선 이들로 바뀌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나이대나 성별은 대중없었다. 가장 자주 찾아와서 학생들 모두가 알고 있는 친구는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와, 키가 좀 작고 안색이 병적으로 새하얀 젊은 남자였다. 둘 다 얼굴에 통 표정이 없었다. 남들이 한 번 겪을 산전수전을 밥 먹듯 겪어서 세상사에 모든 흥미와 의욕을 잃어버린 듯, 메마른 무표정. 교수를 만나고도 반가운 기색이라곤 없었다. 교수도 사무적으로 그들을 맞이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인문관 뒤쪽에서 서성거리다가, 수업을 마치고 나온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며 단열필름을 아주 두껍게 칠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쏜살같이 캠퍼스 밖으로 사라져 버리곤 했다. 


저번 달에 찾아온 사람은 정국보다도 어려보이는 여자아이였다. 끽해야 고등학생. 요즘 어린애들이 화장을 잘하는 것인지, 교칙이 많이 느슨해진 덕인지, 아이의 긴 머리카락은 나무갈색이었고 피부도 크림을 떡칠한 것처럼 희었다. 그리고 똑같은 무표정. 마네킹 같았다. 교수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외모가 특출했다. 반들반들하고 흰 피부에, 비록 표정은 없었을지언정 이목구비가 단정했다. 그리고 이번에 찾아온 네 번째 남자는 그들 가운데서도 단연코 독보적이었다.


강의실까지 찾아온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교수의 친구들은 항상 그 달의 마지막 날, 점심시간을 넘긴 오후에 방문했고 그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인문관 뒤 그늘에서 서성거리는 대신 강의실로 올라왔다. 그는 썰렁한 복도에서 벽에 등을 기댄 채 몇 차례 휘파람을 불었다. 강의실 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밖으로 나갔던 동기가 움찔거렸다. 만인의 시선이 쏟아졌다. 모두 남자를 보며 수군거리거나 대놓고 탐색하는 시선을 던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국도 웅성대는 사람들의 머리통 너머로 그를 볼 수 있었다. 살면서 본 중 가장 잘생겼다고 단언할 만한 얼굴이었다. 외양만 따지자면 교수의 '친구'로 찾아왔던 그 어떤 이들보다도 가장 교수와 어울리지 않는 부류였다.


남자는 학생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회색인지 은색인지 모를 푸석푸석한 탈색모를 눈썹 위까지 늘어뜨렸다. 강단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한 그의 표정이 대번에 환해졌다. 빌.


가방을 챙기고 재킷에 팔을 꿰던 교수가 돌아보았다. 슬쩍 웃는다. 대답한다. 뷔.


강의실 문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정국은 복도 끝의 화장실까지 가서 손을 씻었다.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지만 오로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느릿느릿 복도로 되돌아갔다. 학생들은 그새 대부분이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아직도 강의실 안에서 정국이 모르는 대화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그들이 돌아서서 나왔다. 정국은 얼른 뒷문 쪽으로 이동하여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안을 뒤지는 척했다. 두 사람은 정국을 쳐다보지도 않고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국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순간, 교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걷던 탈색모의 남자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뒤따라가려던 정국은 쿡 찔린 것처럼 황급히 발길을 멈추었다. 눈길을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남자가 소리 없이 씨익 웃었다. 의뭉스러우면서도 어린애같이 개구진 미소였다. 


그가 돌아보지 않는 교수의 귓가로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속삭였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였고, 말씨가 약간 어눌했다. 외국 출생인가? 생김새로만 보면 혼혈이라고 해도 믿을 법했으니.



"쟤, 형 제자지?"



교수를 형이라고 부르다니. 늘 친절하면서도, 세상 모두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는 것처럼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교수에게 저토록 친근한 호칭은 통 어울리지 않았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것이었다. 교수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속삭임을 계속했다.



"운동하는 애 같네. 몸 좋아 보인다."



내 이야기인가? 정국은 생각했다. 남자의 시선을 받는 사람은 아무래도 자신뿐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말은 한층 작아져서, 제대로 알아들은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저런 애들이 맛있어. 피가 맑거든."



분명 잘못 들은 것이라고 정국은 지금까지도 믿고 있다. 교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남자가 다시 이쪽을 힐끔거렸다. 두 사람이 창가를 지나칠 때, 햇빛에 비친 그의 눈동자가 잠깐 인간이 아닌 것처럼 기이한 색으로 반짝였다. 맹수처럼 노란 눈. 호박색 눈동자. 너무 밝은 색이라 거의 황금빛에 가까웠다. 정국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잘못 본 거겠지. 감았다 뜬 시야에서 두 사람은 벌써 사라져 있었다. 


당황한 정국은 황급히 일층 현관으로 쫓아 나갔다. 그들이 빠져나갈 만한 입구는 그곳뿐이었다. 어디로 갔는지 두 사람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캠퍼스 아래로 이어지는 보도에는 수업을 마치고 삼삼오오 무리지어 걸어가는 학생들뿐이었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정국은 황망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묵묵한 햇살 파편이 그의 머리위로 무심하게 떨어졌다.






R, M






  교수는 유명한 소설가다.


  그는 세간에서 '갓 흘린 피 같은 문장'을 구현하는 작가로 불린다. 전례 없이 파격적인 행보와 지위, 교수임에도 액면가는 기껏해야 스물 일고여덟쯤으로 보였다. 진짜 나이는……아무도 모른다. 생년월일을 밝히고 싶지 않다고 담당 편집자에게 부탁이라도 했는지, 그가 쓴 책의 날개 내지 작가 소개 페이지 어디에도 정확한 출생일자는 나와 있지 않았다. 많아봐야 삼십대 초반이겠거니,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교수의 이름은 김남준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세간에서, 그의 책에서, 문단에서 통용되는 이름이다. 그는 이름이 많았다. 모두 자신의 입으로 직접 가르쳐준 것이다. 강의실에서 그는 특이하게도 한국식 이름보다 레이먼드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렸다. 어린 시절 해외에서 오래 지내며 사용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때 불렸던 이름이 윌리엄 레이먼드였다고. 그래서 레이먼드 아니면 빌, 혹은 RM으로 불리는 것이 더 익숙하다고 말했었다. 동기고 선배고 후배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교수를 부를 수 있었다. 그가 개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김남준 교수라고 부르기도 했고 레이먼드 아니면 윌리엄, 아주 가끔 RM이라고 부르는, 교수를 유난히 좋아하는 몇몇 용감한 여자애들이 있기도 하고…….


대체적으로 모두에게 친절하게 구는 교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사무적으로 행동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그를 동경하고 흠모하는 학생들은 차고 넘쳤지만 실제로 울타리를 허물 만큼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용감한 자는 몇 되지 않았다. 언변이 좋고 지식이 많아 수업 중간중간에 유창하게 농담거리를 던지거나 화두를 이끌 수 있는 그였지만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는 교수 사택을 두고 따로 집을 얻어서 산다. 교수 사택은 학교 동문으로 나가서 도보로 오 분 거리에 있다. 본가가 멀거나 외국 출신인 교수들은 대부분 그곳에 살았다. 비까번쩍한 고급 아파트의 외양이었고 내부시설도 그만큼 훌륭하다고 했다. 그러나 교수는 자가용을 타도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서울 어딘가의 외곽지에 적을 두고 거기서 출퇴근을 한다. 아무리 날씨가 궂어도 지각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집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역시 아무도 모른다. 그가  타는 차는 국내 제조사의 평범한 검정색 중형 세단이다. 늘 창이며 보닛이 반짝반짝 윤이 날 만큼 깨끗하게 닦여 있다. 


정국은 예전에 딱 한 번 교수의 차를 얻어 탄 전적이 있었다. 교수로서는 보기 드문 친절이었을 것이다. 그는 늘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양, 수업이 끝나고 나면 아무런 지체 없이 차에 올라타고 캠퍼스를 쌩하니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가방을 챙기고 웃옷을 걸친 뒤 구둣발소리와 함께 복도를 떠나는 그의 뒷모습은, 그러나 달아나는 사람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고 차라리 우아했다. 당시의 정국은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와 서울에서 만날 선약이 잡혀 있었다. 과사에서 조교에게 붙잡혀 있었던 탓에 스쿨버스가 먼저 출발해 버린 참이었다. 다른 버스라도 타야 하나, 생각하며 정류장 근처에 멍하니 서 있는데 가벼운 클랙슨이 들렸다. 교수의 세단이었다. 차창이 내려가고 그가 운전석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서울까지 간다고?"



타요. 그는 친히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손톱을 오물오물 씹으며 망설이던 정국은 얼른 차에 올랐다. 누군가가 그 김남준 교수의 차를 얻어 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차라리 뿌듯한 소문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운전솜씨가 다소 거칠었다. 물이 흘러가듯 유려할 것이라는 정국의 예상과는 딴판이었다. 정국은 몇 번인가 교수가 세게 밟은 브레이크 덕분에 시트 등받이에 뒤통수를 찧었다. 차안에서는 진하고 달콤한 방향제 냄새가 풍겼다. 앉아있다 보니 코가 저렸다.



"약속장소가 정확히 어디라고 했죠?"

"아, 근처 편의점에서 내려주시면 돼요. 안쪽까지 들어가기엔 차가 막혀서……."

"괜찮아요. 어차피 특별한 일정도 없으니까."



퇴근을 앞둔 시간이라 서울로 들어가는 고속도로에는 생각보다 차량이 많았다. 정국은 시트에 등을 파묻고 눈만 깜박였다. 좀 늦을 것 같은데, 친구한테 미리 얘기라도 해둘까…… 멍하니 생각하는 그의 눈에, 룸미러에 걸린 작은 십자가 묵주가 들어왔다. 나무를 정교하게 세공하여 만든 묵주 끝에서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은빛 십자가가 달랑였다. 정국의 시선이 닿는 것을 눈치챘는지 묵묵히 핸들을 돌리던 교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종교 믿는 거 있어요?"



까무룩 잠기기 직전으로 느리게 깜박이던 정국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 없는데요."

"무교? 나도 그런데."

"천주교 믿으시는 거 아니에요?"



교수의 기름한 눈매가 허공에서 흔들리는 십자가로 옮겨갔다. 



"믿는 건 아니고. 그냥 장식용으로 달아뒀지."

"……."

"마스코트 같은 의미로."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자장가에 가까웠다. 따뜻한 공간에 푹 퍼지듯 앉아 있으면 졸릴 수밖에 없는 시간. 피처럼 새빨간 노을이 전면유리 위에 비치는 하늘로 엎질러져 있었다. 강의 들을 때마다 생각한 거지만, 목소리가 지나치게 듣기 좋다. ASMR 같은 거 해도 잘 어울릴 것 같지. 몽롱하게 생각하던 정국의 속눈썹이 이내 느적느적 내려앉았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는지 모르겠다. 진동 하나 없이 부드럽게 달리는 차체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던 정국은, 차문이 둔탁하게 열리는 소리를 듣고 화들짝 눈을 떴다. 차가운 바깥공기가 따뜻한 차내로 훅 밀려들었다. 뺨에 소름이 돋았다. 눈을 뜬 정국은 웬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고 서슴없이 올라타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란 그는 바르작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 결에 조수석 시트가 뒤로 젖혀져 있었다. 뒷자리 승객의 시선이 무심하게 정국의 얼굴로 와 닿았다. 어디선가 보았던 얼굴이다. 민망해서 뺨을 매만지던 정국은 뒤늦게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냈다.


교수의 친구였다. 인문관 뒤에서 수업이 끝나고 몇 번인가 보았던 얼굴이다. 병적으로 창백한 피부색. 교수와 비슷해 보이는 나이. 세모꼴의 눈매가 정국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는 설명해 달라는 듯 교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선약을 이미 잡아놓은 사람이 뒤늦게 끼어든 제삼자를 발견하고 네가 왜 이런 자리에 끼어드느냐 타박하는 것처럼 차가운 시선인지라 정국은 약간 움츠러들었다. 무서웠다. 그리 크지 않은 남자의 눈이 깨진 바둑돌의 단면처럼 반들반들 윤을 냈다. 렌즈를 낀 것인지, 검은자위의 색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진했다. 아무리 한국인이라 해도 잘 보면 초콜릿색, 나무껍질 색, 흙색, 맑은 국물의 색깔인 눈동자들 가운데 홀로 이질적이었다.


교수는 핸들을 돌렸다. 그는 정국이 지금까지 들어본 그의 어조 중 가장 무게 없는 말투를 구사했다. 



"뷔는 잘 만났어?"

"못 만났어. 날씨가 맑을 때 기어 나오는 건 아직 고역이랜다."



남자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교수는 바람소리를 내며 짧게 웃었다. 저렇게 웃는 교수의 모습도 처음인 것 같아 정국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헤벌리고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뒷좌석 남자의 시선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음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교수가 뒤늦게 짤막한 설명을 덧붙였다.



"제자야."

"알아."



안다고? 학교에서 나를 보았다는 뜻인가? 정국이 속으로 가늠하고 있을 때, 남자의 손이 갑자기 교수의 운전석과 정국이 앉은 조수석 사이의 빈 공간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받아. 성마른 목소리가 말했다. 교수는 한 손으로 핸들을 쥐고 다른 손을 어깨 너머로 뻗어 남자가 내민 주먹을 받았다. 정국은 곁눈질로 그들이 주고받는 물건을 훔쳐보았다. 작고 반짝이는 쇠붙이였다. 귀걸이. 피어싱인가? 동그란 고리에 작고 긴 쇠사슬 같은 것이 매달려 있다.



"오늘 만나면 주려고 했는데 못 만났으니. 네가 대신 전해줘."



교수가 그것을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통째로 빠진 거지? 많이 아팠겠는데."

"먹이한테 귀를 물어뜯겼어."



남자의 시선이 다시 정국의 뺨을 힐끔거렸다. 피부가 따가웠다. 귀를 물어뜯겼다고? 먹이한테? 정국은 입이 쩍 벌어지려는 것을 참았다. 사나운 개에게 먹이를 주다가 사고라도 당했다는 뜻인가? 그 불행한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피어싱이 통째로 뜯겨나갈 만큼 세게 물렸다면 어마어마한 고통이 뒤따르지 않았을까, 차마 상상하는 것조차 괴로워 콧등을 찡그렸다. 교수는 그토록 끔찍한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지 액셀을 밟아 속도를 올리며 대꾸했다.



"알았어. 조만간 제이를 만나러 가야 하니까, 그때 전해주면 되겠네."

"누구누구 온다고 했지?"

"지민이, 뷔, 형, 나, 제이까지."



교수의 입에서 '형'이라는 호칭이 나오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연하로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당연한 일이었지만 신기하고 낯설었다. 늘 연상으로만 존재할 것만 같은 이미지 때문인가. 남자는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많이도 오는군."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무미한 태도였다. 나지막한 그 말을 끝으로 차안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서울로 들어서는 인터체인지를 통과하여 종로2가의 대로를 지나쳤다. 정국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이따금 교수와 등 뒤에 앉은 남자의 기색을 번갈아서 살폈다. 교수는 기어코 약속장소 근처까지 가서야 정국을 내려주었다. 여전히 거친 운전솜씨에 정국의 동그란 머리통이 세차게 흔들렸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잠깐만."



차문을 열고 내리려던 정국의 팔이 붙들렸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가죽장갑을 낀 교수의 손이 돌연 정국의 얼굴로 바짝 다가왔다. 까물짝 놀란 정국의 뒤통수가 시트의 머리받침대에 부딪쳤다. 교수의 긴 손가락이 정국의 시야를 가리더니 앞머리에 붙은 무엇인가를 떼어갔다. 조그마한 먼지 조각이었다. 지나치게 놀란 것이 되레 민망해진 정국이 눈길을 떨어뜨리는데 교수의 손가락이 그의 뺨을 스치듯 건드렸다. 가죽에 덮여있음에도 깜짝 놀랄 만큼 차가운 감촉이었다.



"수업 때 봐요."



다정함을 가장한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예의 그 익숙한 말투. 교수의 손가락이 정국의 앞머리에서 떼어낸 먼지조각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정국은 재빨리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가 문을 닫자마자 차체는 미련 없이 그를 남겨두고 출발했다. 그리고 붉은 후면등을 켠 차량의 행렬 사이로 섞여들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갓 흘린 피와 같은 선홍빛 문장'을 쓰는 교수는 단연코 추리소설로 유명했다. 정국은 그의 수업을 듣기 전 교수의 소설을 두 권이나 읽었다. 독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로서는 나름대로의 작심이었다. 게다가 그가 고른 소설 두 권은 모두 500페이지를 족히 웃돌 만큼 두꺼웠다. 둘 다 살인자의 행방을 추적하는 내용이었으나 그 중 좀 더 재미있게 읽었던 책은 은박으로 장식된 붉은색 양장본이었다. 어느 살인자가 바닷가 시골마을에서 첫 살인을 저지른 뒤 야금야금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과정을 독백으로 묘사한 소설. 며칠에 걸쳐 두 권을 모두 정독하고 난 뒤, 하도 일부 대목을 되풀이해 읽어서 아예 대사를 외우고 말았다. 정국은 그 살인자가 첫 살인을 저질렀다는 장소를 탐문 차 찾아가볼 생각이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교수가 새로이 내준 과제는 빈말로라도 결코 쉽다고 할 수 없었다. 소설의 실제 배경이 된 장소를 직접 탐사하고, 에이포지 석 장 안으로 자유형식의 칼럼을 써야 한다. 애당초 정국의 흥미분야와는 오천만광년 쯤 동떨어진 과목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전공도 아니면서 구태여 이 수업을 택한 까닭은 오로지 교수 하나 때문이었다. 호리호리하게 큰 키와 작은 얼굴, 모델이라 해도 손색없을 프로필, 나긋나긋한 목소리, 수업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한 번쯤 찾아서 듣고 싶어할 만큼 유명한 강의론. 과제를 알려주고 난 뒤 교수가 덧붙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첨언하지만, 점수를 잘 받기 위해 굳이 제 소설을 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가산점은 없으니까요. 말대로 할 속셈이었는지 여자아이들 몇 명이 아쉽게 웃었다. 


탐사를 가려면 기차부터 타야 했다. 학기 중 평일이었으므로 자리가 그럭저럭 많았다. 홀로 기차를 타는 것도 아주 오랜만이었다. 굳이 기차를 타야 할 만큼 멀리까지 가는 수고를 충분히 감수할 용의도 있었다. 정국은 아끼는 카메라를 챙기고 작은 배낭 하나를 멨다. 당일치기로 다녀올 생각이었으므로 짐이 가벼웠다. 사람이 드문드문 찬 열차에 앉아 숨을 깊이 들이쉬고 눈을 감는다. 가는 시간 동안 잠이나 한숨 푹 잘 생각이었다. 


누군가가 눈을 감은 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올려다보았다. 잘못 본 줄 알았다. 교수가 정국의 눈앞에 서 있었다. 학교 밖에서 마주치는 것은 처음이었다. 길고 검은 코트에 검정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정국을 내려다보고 있다.



"교……교수님."



정국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를 짚은 교수의 손이 만류하듯 가만히 힘을 실었다. 일어서지 못하고 엉거주춤 앉아 있으려니 그의 눈이 찬찬히 정국의 얼굴을 살핀다. 정국은 시선을 피했다. 잡은 먹잇감을 천천히 휘감는 뱀의 눈빛을 마주 대하는 것 같다.



"평일인데. 어디 멀리 가요?"

"저, 교수님의 과제 답사를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래? 어디로?"

"<붉은 살인자>의 배경지로……."



<붉은 살인자>는 교수의 베스트셀러 중 가장 인기가 좋은 책이었다. 은박으로 장식한 붉은색 양장본. 항간에서는 영화로 제작되려 했으나 원작자인 교수가 결단코 거절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물거리는 정국의 말을 듣고 교수가 웃는다. 그가 웃었다. 뺨에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작은 얼굴에 송곳자국처럼 선명히 파이는 그 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웃는 교수는 그의 조교와도 연배가 비슷해 보였다.



"마침 잘됐네요. 나도 그리로 가던 길이라서. 거기서 <붉은 살인자>의 1부를 집필했는데, 가끔 시간이 나면 집필했던 장소로 찾아가서 시간을 죽이다 오거든요."



잘됐다고? 정국은 멍하니 그 말을 입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당신과 같은 행선지로 가게 된 것이 잘된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내 자리는 저쪽이니까. 편하게 가요."



교수는 정국과 비스듬하게 마주보는 자리로 향한다. 대각선으로 바라보이는 좌석에 그가 앉는 것을 보고 정국은 속으로 탄식했다. 망했다. 편하게 가라고? 좌석 위치부터 이미 실패다. 심장이 지나치게 쿵쿵거려서 가슴이 아팠다. 기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인다. 손바닥으로 비빈 물감 자국처럼 창밖의 풍경이 죽죽 늘어진다. 그 김남준 교수와 한 기차를 타고 같은 행선지로 가고 있다니.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신경이 쓰여 죽는 정국과 달리 교수는 아무 생각 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그는 가방에서 테가 얇은 안경과 책 한 권을 꺼냈다. 기차운행의 역방향 좌석에 앉아 있음에도 멀미를 하지 않는지, 그는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정국은 교수의 숙인 이마와 그 위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 굳게 다물린 입술, 책장을 넘기는 긴 손가락 따위를 훔쳐보았다. 방금 전 잠깐 보았던 교수의 보조개가 어른거렸다.


차창 밖으로 정신을 앗기다가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다. 얼결에 눈을 떴을 때 정국은 까무러치듯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교수가 그의 앞에 서서 긴 그림자를 머리위로 드리우고 있었다. 언제 썼는지 시커먼 선글라스의 렌즈가 조명을 받아 반들거렸다. 속이 보이지 않는 검은 색유리 위로 정국의 놀란 얼굴이 비쳤다.



"도착했어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 승강구 쪽으로 돌아섰다. 정국은 허겁지겁 짐칸에서 가방을 끌어내려 어깨에 메었다. 


이런 상황에 와서 급작스레 되새겨봐야 아무 부질없다지만,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승강구에서 뛰어내려, 저만치에서 앞서 걷는 교수의 뒤를 마치 수행원처럼 졸졸 쫓아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것이다. 나 분명 이러지는 않지 않았었나, 하고. 빈말을 덧붙이려 해도 교수와는 결코 가깝다고 할 수 없는 학생. 교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있다면 자신은 그가 가르치는 수백 명의 학생들 중 지나가는 학생 1, 정도의 가명으로 겨우 두어 마디나 붙이면 다행일 거였다. 교수와 친한 무리는 따로 있었다. 사실 늘 일정거리를 유지하고 사생활을 흘리지 않는 교수의 성격 때문에 친하다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애들은 교수에게 살갑게 말을 붙일 줄 알았다. 정국이 보기에는 정말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감탄이 나올 만큼 가벼운 장난도 걸 줄 알았고 교수에게 커피 따위의 선물도 종종 건네곤 했다(교수가 몇 번 딱 잘라 거절하고서부터는 없는 일이 되었지만). 


전공도 아니고, 딱히 발표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필기에 목을 매지도 않는 정국은 그저 교수의 얼굴이 적당히 잘 보이는 자리에 끼어 앉아 멍한 얼굴로 강의를 듣다가, 수업이 끝나고 밖으로 나가는 교수의 뒷모습을 또 멍하니 보다가 서둘러 그 뒤를 따라 나가면 그만이었다. 재미는 있었다. 교수는 말주변이 좋았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다 저럴까. 머릿속으로 정리한 생각을 종이 위에 새기는 것과 입으로 쏟아내는 것은 사실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임을 알면서도, 정국은 늘 여유롭게 웃는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저 사람도 당황하는 일이 있을까, 혼자 생각하곤 했다. 좀 더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게 된다면 저런 사람이 되어야지, 결심한 적도 있었다. 부끄러워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동경하는 인간상이었기 때문이다. 유머가 없진 않아도 화술이 부족한 정국으로서는.


그런데 교수가 지금 명백히 자신을 독대하며 교원 밖에서의 일상을 조금씩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우연에 그치지 않고 자의적으로 정국에게 틈을 내주며. 


교수는 익숙하게 역사를 나가 광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간다. 그의 목적지는 광장 오른편에 붙어있는 마을버스 정류장인 모양이었다. 읍내로 들어가는 교통수단은 그뿐이었던 터라 정국도 하는 수 없이 교수의 뒤를 따랐다. 밋밋한 광장을 가로지르면서 정국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뿌연 구름이 퍼즐 맞추듯 속속들이 끼어드는 것이 심상찮았다.






  '그 골목길에서 두 명의 남자가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추리소설치고는 평범한 문장이다. 발끝에 닿는 돌멩이 하나, '그 골목길'에서 짖던 개의 울음소리까지도 살인의 단서로 사용하는 필력을 배제한다면. 정국은 심심풀이처럼 워커 코로 돌멩이 하나를 걷어찼다. 데구르르 굴러간 돌멩이가 비탈길로 접어든다. 아무렇게나 굴러가는가 싶더니 이내 길 옆의 작은 도랑으로 쑥 빠져버렸다.


안타깝게도 한 번 구름 속으로 숨은 해는 다시 고개를 내밀지 않았다. 여지없이 비가 내릴 것이다. 벌써 공기가 축축했다. 정국은 좁고 여기저기 깨진 골목길을 하염없이 올라갔다. 눅눅한 바람이 불었다. 멀지 않은 곳에 포구가 있기 때문이다. 소금기 섞인 바람이 뺨과 머리카락에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었다. 아침에 새로 감고 나온 머릿결이 금세 푸석해졌다. 카메라 가방이 묵직하게 어깨 위에서 흔들린다. 무겁다. 분명, 기억이 맞다면 소설의 제1부 5장의 어느 대목에서 등장했던 골목길 어귀를 접한 정국은 재빨리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이 맞는 것 같다. 소설의 일부 구절이, 아니 그 대목 전체가 일목요연하게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두 명의 남자가 이 골목길에서 살해당했다. 피를 모조리 빨려 석고상처럼 허옇고 딱딱해진 몸이 담벼락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었다. 목격자는 솜뭉치 인형 내지 마네킹이 걸려있는 줄 알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가 그것이 시체 두 구임을 알아챈 것은 개 때문이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는 똥개 한 마리가 시체들을 보고 이를 드러내며 요란스럽게 짖어댔던 것이다. 


대충 여기의 담벼락이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낸 정국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아래쪽에서 골목길 위를 올려다보며 찍고, 다시 중간까지 올라가 길 양옆으로 늘어선 낡은 집들의 담장과 지붕을 찍는다. 개에 관한 이야기가 또 뭐가 있었지. 뭐였더라. 길을 벽처럼 에워싸고 일렬로 늘어선 집들 중 반 이상이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 같다. 골목 위로 올라갈수록 낡은 정도가 심해져, 지붕이 폭삭 내려앉은 집도 두엇 있었다. 음습하다. 담장은 대부분이 정국의 키보다 낮았다. 얼기설기 늘어선 전깃줄이 이마에 걸릴 것 같았다. 날은 점점 더 싸늘해지고, 바람이 코트 안쪽까지 파고들고, 검은 구름의 파도가 머리위에서 음산하게 물결친다.


골목을 거의 반쯤 올라갔다고 생각했을 때, 정국은 문득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길 아래쪽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교수였다. 틀림없이 그였다. 바람에 나부끼는 긴 코트자락. 흐린 날인데도 여전히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정국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왜 저렇게 쳐다보고 있는 거지.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교수의 시선이 자신의 목덜미부터 가슴, 배, 허벅지, 종아리, 발끝까지 두껍게 감싸는 것 같아서였다. 아니, 감싸는 게 아닌가. 외려 썩썩 베일 것 같은 시선이다. 멀리서 보고 있음에도 입안이 다 말랐다. 사진이나 빨리 찍고 돌아가야겠다. 정국이 서둘러 카메라를 도로 가방에 집어넣고 걸음을 옮기는 찰나였다.



"내가 배경으로 삼은 곳은 더 위쪽인데."



정국은 악, 하고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삼켰다. 심장이 발바닥까지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교수의 목소리가 그의 바로 등 뒤에서 나직하게 들려왔다. 분명 한참 아랫길에 서 있었으므로 여기까지 걸어서 올라오려면 적어도 몇 분은 걸려야 마땅했다. 삼 초, 삼 초는 되었을까? 축지법이라도 쓰지 않으면 불가능할 시간이었다. 


간신히 고개를 돌리자 교수의 미소짓는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안이 비치지 않는 정교한 선글라스 아래로, 두툼한 입술이 아주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다. 뺨에는 보조개가 깊게 패어 있다. 강의 중 저렇게 웃는 일이 흔했던가? 정국이 홀린 듯 눈만 깜빡이는 사이 교수가 그의 손을 쥐었다. 그는 부드럽게 정국의 손을 잡아 이끌며 계단 위로 걸어 올라갔다.



"교, 교수님, 어디……."

"이쪽이 사진 찍기엔 더 수월할 거야."



손가락이 가볍게 감겼을 뿐임에도 뿌리칠 수가 없다. 정국은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를 뒤따랐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한참 오르다가 옆으로 빠지자 철제난간을 두른 작은 공지가 나왔다. 마을의 전경은 아니더라도 골목길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의 전망이었다. 교수는 정국의 손을 놓지 않고 난간 바로 앞까지 데려가서 아래를 내려다보게 했다. 바다를 낀 동네였다. 멀리서 포구의 검은 물결이 일렁이고 흰 포말이 부서진다. 어디선가 줄곧 풍겨오던 비린내는 바닷물 냄새였던 모양이다. 작고 작은 소도시. 도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시골마을. 구름이 심하게 끼어 해가 질 시간인데도 노을 한 점 비치지 않았다. 축축한 바람이 정국의 머리카락을 휘감고 교수의 옷깃을 헤집었다.



"곧 비가 오겠군. 비 냄새가 나는걸."

"……."

"사진 안 찍을 건가?"



십 리 밖의 손톱만한 포말을 멍하니 바라보던 정국은 교수의 채근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허둥지둥 카메라를 눈높이로 들어올렸다.



"아니. 거기가 아니라."



교수가 고개를 저으며 정국의 등 뒤로 돌아왔다.



"여기서 저 아래까지……."



교수는 정국의 바로 뒤에 서서 그를 껴안다시피 하고 카메라를 대신 들어올려 각도를 고쳐주었다. 정국의 어깨와 목이 빳빳하게 얼어붙었다. 교수의 차를 탔을 때 맡았던 독한 방향제와 비슷한 향수냄새가 훅 끼쳐왔다. 코가 간지러웠다. 정국은 코를 훌쩍이며 딱딱해진 몸에서 애써 긴장을 풀기 위해 애를 썼다. 가죽장갑을 낀 교수의 손끝이 정국의 손등에 닿았다. 이상했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는데도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냉장고에 들어간 듯 서늘해서 뒤통수가 바짝 곤두섰다. 얼이 나간 사람처럼 정국은 무의식중에 버튼을 눌렀다. 맥없는 셔터 소리가 공지의 정적을 깨뜨렸다.



"날씨가 좀 좋을 때 오면 더 예쁜 사진이 나왔을 텐데."



교수가 아쉬운 듯 짧게 혀를 찼다. 길쭉하고 예쁜 손가락이 발밑에 있는 꼬부랑 미로 같은 골목길을 하나하나 짚었다. 저기엔 주인공이 도색작업을 하는 가게가 있었고, 저기서 시체 두 구를 발견했으며, 저기서는 주인공의 친구가 개와 함께 범인을 뒤쫓았다, 고 그가 일러주는 설명은 정국의 귓전에서 미끄러졌다. 동그란 눈이 대신 교수의 유려한 손가락을 따라 가죽장갑 아래로 뻗은 손목의 뼈를 멍하니 쫓아간다. 저기서 범인이 다른 도시로 떠날 결심을 세웠다, 까지 설명하여 대략 1부 전체의 내용을 골목길 위에서 마무리지은 교수가 손을 내리고 정국의 얼굴을 돌아본다. 검은 렌즈 뒤로 숨겨져 있을 시선에 아연해져 정국은 황급히 골목길을 내려다보는 척 눈길을 피해버렸다.



"이제 각자 헤어질까요?"

"네?"

"이 동네에 사는 친구를 좀 만나야 해서."



친구가 있었다니. 이런 촌동네에, 젊은 사람이라곤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이 시골마을에? 정국은 의아해졌으나 자신이 물을 범주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입을 다물었다. 교수는 딱히 대답을 구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으므로 말없이 코트자락을 여몄다. 그리고 앞서 공터를 벗어난다. 좋은 사진 많이 찍어요. 그가 인사처럼 남기고 간 말이 공지에서 맴돌았다. 정국은 카메라를 들고 멀리서 쉼없이 부서지는 파도를 찍으려다가, 문득 렌즈에서 눈을 떼고 난간 너머의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얼마쯤 기다리면 교수가 이 아랫길을 따라 내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십여 분이 넘도록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렸음에도 교수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기어코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정국이 출사를 마치고 역으로 돌아가기 위해 큰길가의 버스정류장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조그마한 동네 전체가 금세 흠뻑 빗물에 잠겼다. 우산이 없었던 정국은 황급히 버스정류장의 처마 밑으로 피신했다. 벌써 머리카락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매달렸다. 버스가 언제 오나 목을 쭉 빼고 길 저편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막차 시간은 삼십 분도 채 남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택시를 타고 역으로 가지 않으면 열차를 놓칠 만큼 촉박한 시간이었다. 대충 한 시간도 넘게 이 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지나다니는 택시조차 단 한 대도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만큼 도로에 인적이며 차량이 전무했다. 설상가상으로 해가 완전히 졌는지, 한층 두터워진 어둠이 빗줄기와 함께 땅 위로 묵적하게 깔렸다.


어디서 비를 피해야 하나, 이래서 역까지는 어떻게 가지…… 난감하게 시커먼 하늘을 올려다보던 정국의 시선이 문득 길 건너편으로 향했다. 그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맞은편의 버스정류장에 틀림없이 교수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갑자기 나타났다. 어둠과 빗줄기 속에서 마치 유령처럼.


비가 질척하게 퍼붓는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색안경을 쓰고, 검고 긴 코트를 걸쳐서 차라리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심지어 구둣발. 그리 넓지 않은 도로인지라 저편에 서 있는 사람의 옷차림이 빗속에서도 세세히 시야에 잡혔다. 분명 비를 피해서 여기까지 걸어왔을진대 물기가 한 방울도 묻지 않은 것 같았다. 언제 나타나서 저기에 서 있었는지도 몰랐다. 기척이, 없었는데…… 정국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간다.


아무도 없는 길가, 두 개의 버스정류장, LED조명도 아닌 구식 수은등의 불빛에 의지하여 서 있는 정국과 교수의 사이로 차선 두 줄만큼의 침묵이 흐르고, 이윽고 교수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길을 건넜다. 그는 옷처럼 새까만 장우산을 펼쳐서 썼다. 바닥에 고인 빗물에 비친 그림자 때문인지, 걸음걸이도 마치 수면 위의 유령인 양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어렵잖게 길을 건너온 그가 정국의 곁에 섰다. 하루 종일, 어째, 떨어질 수가 없네. 정국은 추위로 말라가는 입술을 애써 침으로 적셨다.



"집에 가는 길인가요?"



교수가 물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듣자, 얼어붙은 손끝을 불꽃 앞으로 갖다댄 듯 손가락이 저릿저릿했다.



"지금은 차가 없을 텐데. 이 동네는 비가 오면 택시고 버스고 빨리 끊겨서."

"몰랐……몰랐습니다, 교수님."



이방인이 그런 걸 알 턱이 있나. 또다시 긴장으로 정국의 주먹이 동그랗게 말렸다. 선글라스 뒤로 교수의 시선이 정국의 축축하게 젖은 몸을 훑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정국은 버릇대로 콧등을 찡그리며 등을 곧게 폈다.



"옷도 다 젖었고. 어디 들어갈 곳이 필요하겠는데."

"……."

"저녁 아직 못 먹었다면 근처에서 간단히 요기부터 할까요?"

"저는 괜찮……"

"날이 추울 땐 뭐라도 먹어서 피가 빨리 돌게 해야죠."



교수가 정국의 말을 뚝 자른다. 정국은 부질없이 달싹이던 입을 다물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교수가 다시 검은 우산을 펴며 물었다. 



"근처에 잘 아는 식당이 있는데. 백반 좋아해요?"






  교수가 정국을 데려간 곳은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박힌 자갈집들 중에서도 중턱에 위치한 어느 조그만 백반식당이었다. 수은등 서너 개의 불빛이 빗줄기 속에서 가물가물 어룽졌다. 주방에서 밥을 짓거나 거실 불을 켰는지 창살 사이로 불빛이 흘러나오고, 어디선가 빗물의 비린내에 희미하게 타는 냄새가 섞여들었다. 우산이 다 가려주지 못해 청바지의 무릎 아래쪽은 이미 흠뻑 젖었다. 곱은 손가락 끝이 빳빳하게 얼어갔다. 


생선갈빗대 모양의 피뢰침이 야트막한 슬레이트 지붕 위로 삐죽이 솟아 있는 그 백반집은, 가게 한쪽으로 작은 구멍가게를 두고 나머지를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마당의 시멘트는 여기저기가 깨져 있다. 구석에는 파란 지붕의 개집이 있고 그 옆에 나무말뚝을 박은 뒤 작은 방수포를 덮어 천막을 쳐놓았다. 흰 털이 땟국으로 군데군데 찌든 강아지 한 마리가 천막 아래 엎드려 있다. 교수는 가게 안으로 직행했지만 정국은 개집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강아지가 그를 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프로펠러처럼 붕붕 열심히 휘날리는 꼬리가 귀엽다. 턱을 살살 긁어주다가 머리를 쓰다듬자 자기 예뻐하는 줄은 알았는지 헥헥거린다. 


백반 2인분을 주문하니 생각보다 빨리 음식이 나왔다. 작고 네모진 테이블이 그릇으로 꽉 찼다. 교수는 반찬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국물부터 먼저 떠먹는다. 희뿌연 국물 안에 든 온갖 부위의 고기조각들을 천천히 골라낸다. 김이 서려서인지 선글라스도 벗었다. 정국은 새삼 그의 옷차림과 허름한 가게 안을 둘러본다. 가게 안에는 객이 많지 않아서 그들을 포함하여 여덟 테이블 중 고작 세 자리만이 차 있었다. 한구석에 쌓여있는 플라스틱 맥주바구니들과 낡은 포스기, 표면이 반들반들하게 닳은 나무테이블, 허공에 매달린 파리끈끈이 따위의 초라한 세간과 교수의 세련된 검은 코트는 하등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교수는 곧잘 이곳을 드나들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국물을 떠먹는 수저질이 편안해 보인다. 정국은 그 앞에서 좀처럼 수저를 쉬이 놀리지 못하고, 뻘겋게 나온 다대기만 몇 숟갈 떠서 국물 안으로 푼다.



"입맛이 없어요?"



교수가 정국을 쳐다본다. 까만 눈. 정국은 황급히 숟가락으로 국물을 휘저었다.



"아, 아뇨."

"이 집이 이 동네에서는 그나마 제일 맛있는 집인데. 예전에 집필할 때 자주 먹고 갔었죠."



그의 말투는 언제나 나긋나긋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김남준. RM. 레이먼드, 혹은 윌리엄. 일전에 본 그의 친구는 그를 빌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나는 그를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정국은 젓가락을 깨물며 생각한다. 입맛이 없냐고 묻던 교수는 정작 밥을 서너 숟갈이나 겨우 뜨는가 싶더니 이내 수저를 놓았다. 그리고 가게 안을 휙 둘러보았다. 순한 듯 날카로운 눈매가 가게주인의 불그레한 얼굴, 유리문 밖에 오도카니 놓인 개집, 뭐라고 쉴 새 없이 떠드는 낡은 텔레비전 수상기, 그리고 간간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안쪽 방까지 시선을 던졌다. 무던한 눈이었다. 정국은 속이 울렁거려 밥 한 그릇을 다 비우지도 못했다. 이렇게 긴장할 까닭이 없는데, 별일이었다.


백반집을 나섰다. 반도 못 비운 밥이 뱃속에 덜컥 얹혔다. 위가 불편하다. 빗줄기는 그새 더 굵어지고 말았다. 바닥에서 튀어오른 물기가 무릎까지 적신다. 우산을 쓰지 않으면 돌아다니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날씨였다. 바람이 정국의 머리카락을 흩뜨린다. 순식간에 뺨이 축축해졌다. 교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얼굴로 몰아치는 비바람을 막았다. 어딘가를 올려다보던 그가 손가락으로 길 위쪽을 가리키며,



"저 집."



이라고 했다. 정국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몰아치는 빗줄기 사이로, 저만치에서 유난히 하얗게 반짝이는 불빛덩어리가 보였다. 네 개쯤 되는 창문들 중 두 개에서 마치 등대처럼 지나치게 밝고 허연 빛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이 동네를 조사하는 동안 저 집에서 묵었지."

"……."

"집주인이랑 안면이 있어요. 하룻밤 묵고 가죠. 보기보다 깨끗하고, 숙박비도 필요 없으니까."



낮에 보았을 때에는 분명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한 폐가들만 널려있던 곳이다. 정국은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그 흰 빛을 올려다보았다. 너울거리는 도깨비불에 홀린 사람처럼. 날씨가 이따위다 보니 거절할 계제도 못 되었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던 택시들이 떠올랐다. 게다가 교수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묘한 힘이 있다. 그의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손이 또다시 정국의 팔뚝에 감겼다. 가죽장갑을 끼고 있을 때가 차라리 낫다 싶을 만큼, 달라붙는 피부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비가 와서 그런 거겠지. 정국은 애써 생각한다. 마당에서 나가려다 문득 파란지붕 개집을 돌아보았다. 비바람을 피해 안으로 꽁꽁 숨었는지 강아지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교수가 정국의 머리 위로 우산을 기울였다. 검은 장우산은 성인남자 둘을 비바람으로부터 지켜주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좀 가까이 와요."



교수의 한 손이 정국의 어깨를 단단히 쥐고 부축하듯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마저도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정국은 비틀거리며 그를 따라 여기저기 깨지고 부서진 시멘트계단을 올라갔다. 도깨비불처럼 허연 빛 덩어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발밑에서는 더러운 빗물이 쉴 새 없이 부서졌다. 


문패도 없는 대문 앞에서 교수는 발길을 멈추었다. 칠이 벗겨진 붉은 대문. 전단지가 붙었다가 떨어져 나간 여기저기에 테이프 자국이 남아있다. 교수는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문을 밀었다. 열려 있었다. 끼이익, 녹슨 경첩이 울부짖는 소리에 정국이 미간을 찌푸렸을 때 교수는 벌써 대문을 활짝 열고 어질러진 마당 안으로 들어선다. 환한 불빛이 마당 여기저기에 놓인 쓰레기더미를 비추었다. 올려다보기가 괴로울 만큼 눈부셨다. 이상한 천 쪼가리 같은 것들이 본래는 화단이었을 벽돌담 밑에 쌓였고 반대쪽에는 고물 폐차에서 떼어낸 것 같은 온갖 모터와 엔진, 핸들 따위의 부품이 작은 언덕을 이루었다. 쓰레기들 위로 비가 쏟아지고 그 위로 다시 창문에서 흘러나온 허연 불빛이 내려앉은 몰골이 몹시 음산했다. 여기가, 대체……믿을 곳은 맞는 건가. 정국이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동안, 교수는 태연하게 현관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인터폰에 대고 속삭인다.



"나야."



지잉. 현관문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였다. 문짝이 툭 떨어져 나가듯 열린다. 동시에 지나치게 밝은 빛이 한층 더 넓게 교수의 전신을 감쌌다. 그가 머뭇거리는 정국을 돌아보며 손짓했다.



"들어와요."



실내가 터무니없이 밝았다. 문이 완전히 열리는 순간 정국이 두 손으로 눈을 가려야 했을 만큼. 현관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보이는 거실은 그리 넓지 않았으나, 안쪽으로 길게 뻗은 복도 양 옆으로 마치 하숙집처럼 방문 몇 개가 드문드문 줄지어 있다. 하나같이 꼭꼭 닫힌 채였다. 저 방들 중 어디에서 그리도 등대 같은 불빛이 새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거실 천장의 전등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와 정국은 숨을 멈추었다. 자박자박, 슬리퍼 끄는 소리, 그리 무겁지 않고 오히려 경쾌하게 느껴지는 발소리가 복도도 거실도 아닌, 왼편으로 뻥 뚫린, 아마도 주방인 듯한 공간에서 나타나 두 사람을 맞이한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중키의 젊은 남자였다. 모르는 얼굴이다. 강의실에도 찾아온 적 없는 사람이다.



"레이먼드."



남자가 빙긋 웃었다. 입매가 하트 모양으로 벙싯, 벌어진다. 마치 그들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난데없이 들이닥친 두 사람을 보고도, 심지어 초면인 정국을 마주하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레이먼드. 교수가 강의실에서 자주 사용하던 이름이다.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길게 늘어지는 입술 옆으로 또다시 보조개가 푹 파였다.



"안녕, 제이. 오늘은 손님도 있어."

"3번 방 빌려줄까?"

"오늘은 3번은 아니야."

"그래?"



남자의 눈이 반짝였다. 무언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표정이다. 그는 곱게 휘어진 눈으로 정국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복도 안쪽으로 걸어간다. 교수가 그 뒤를 따르고, 정국이 허둥지둥 맨 마지막으로 쫓아간다. 양말 신은 발에 차가운 바닥이 섬뜩하게 밟혔다. 집 전체가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종일 응달진 것처럼 으슬으슬하게 추웠다. 외관보다 내부가 훨씬 더 넓어보였다. 앞서가던 남자가 맨 안쪽에서 두 번째 방의 문을 열었다. 교수가 전등 스위치를 켰다. 거실처럼 지나치게 밝지도 않고, 미색의 벽지와 누런 장판이 깔린 여느 가정집의 방이었다. 약간 누르스름한 불빛이 방안 구석구석까지 닿지 못하고 그림자를 남긴다.



"안 쓴 지 오래돼서 사람한테는 좀 추울걸."



집주인이 말했다. 교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괜찮아."

"3번 방은 요즘 항상 깨끗하게 치워두니까 알아서 써라."

"오늘은 필요 없어."

"그래? 너 지금 좀 아슬아슬해 보이는데?"



남자가 웃으며 자신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교수가 느릿느릿 다시 웃었다. 웃는데, 입술 끝이 약간 삐딱하게 비틀렸다.


정국이 황망하게 안을 둘러보는 사이 등 뒤에서 방문이 닫혔다. 아차. 그 소리에 뒤늦게 정국은 움찔거린다. 방 한가운데에, 공간의 넓이에 비하여 좀 지나치게 크다 싶은 침대가 하나 놓여 있고 벽에는 조립형 옷장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다른 가구는 없었다. 창 하나가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 뻥 뚫려 있고 그 너머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보인다. 주인남자의 말대로 오랫동안 쓰지 않았는지 방 전체에 거실보다 더한 냉기가 감돌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그저 치워놓기만 한 느낌이 역력했다. 어깨를 움츠리는 정국을 두고 교수는 태연히 옷장을 열고,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옷장 안에 생뚱맞은 목욕가운 두 벌이 걸려있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정국은 입을 열었다.



"교수님, 저, 제 방은……."

"아, 다른 방은 저 친구가 여러 가지로 쓸 일이 있어서. 다른 가구가 많아서 아마 잠자기엔 불편할 거예요."



검은 터틀넥 스웨터 아래로 그의 날개뼈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정국은 멍하니 응시했다. 할 말을 잃은 그를 교수가 돌아본다. 턱짓으로 문을 가리키며,



"화장실은 복도 끝에."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정국은 무심하게 움직이는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과연 몇 발자국 거리에 화장실 팻말이 박힌 문이 있었다.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센서등이 켜져야 할 복도는 전지가 나갔는지 그저 어둡기만 했다. 화장실 안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낡은 화장실 특유의 지린내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희미한 세척제 냄새가 풍겼다. 물을 틀어 손을 씻은 정국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피곤하고 지쳤지만, 긴장으로 하얗게 치켜뜬 눈에 핏발이 얕게 서 있다. 불빛이 창백해서인지 안색이 유독 나빠 보였다. 행선지가 같은 것은 그래 어떻게 넘어간다 치더라도, 교수와 같은 방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오늘 겪은 일 중 그가 예상 가능했던 것이라곤 기차를 탄 것이 전부였다.


밖에서는 아직도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작은 태풍에 버금가는 날씨다.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났을 때쯤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쩐지 기약 없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내일을 다짐하며 정국은 무심결에 세면대를 내려다보았다가, 자신이 치약은커녕 칫솔조차 챙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망연하다. 세수도 해야 하는데. 허연 사기를 다듬어 만든 세면대에는 비누곽조차 없다. 


집주인에게 물어보기가 면구스러워, 공연히 거울을 옆으로 밀어보고 벽에 붙은 작은 선반을 열어보기도 하던 정국은 차라리 자신이 직접 세면도구를 조달해 오겠다고 마음먹었다. 방으로 돌아가니 교수는 그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는 정국이 벗어두었던 코트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아까 밥을 먹었던 백반집 구석에 조그맣게 자리잡은 구멍가게를 떠올리며 정국은 다시 웃옷을 걸쳤다.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오다가 집주인과 마주쳤다. 갸름한 얼굴이 정국을 발견하고 빙긋 웃으며 묻는다.



"어디 가요?"

"잠깐 살 게 있어서요, 요 밑에 슈퍼 좀……."

"비가 많이 오는데. 뭐가 필요한데요?"

"세수할 거랑, 칫솔 치약이요."



집주인은 흠, 하고 중얼거리며 정국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질 때쯤에야 눈길을 거두고 정국의 어깨를 두드린다.



"신발장에 우산 있으니까 쓰고 가요. 나도 여분을 주고 싶은데 남은 게 없네. 우리야 뭐 그런 거 쓸 일이 없으니까."



그 알쏭달쏭한 마지막 말을 되새겨볼 틈도 없었다. 그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으로 들어가버렸다. 현관으로 나온 정국은 신발장에 기대어 있던 우산을 집어들었다. 밤하늘 아래로 우산을 펼치던 그는 문득 현관에 교수의 구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딜 함부로 나돌아다닐 날씨가 아닌데, 어디로 간 거지?


하도 빗물이 많이 고여서 자칫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계단은 턱이 높고 가팔랐으며, 시멘트 마감이 엉망이었다. 고인 물이 작은 폭포를 이루어 콸콸 흘러내렸다. 정국은 빗물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 시야를 가늠하며 조심스럽게 골목 아래로 내려간다. 어디쯤에 그 백반집이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어두운 골목길에는 인적이 하나도 없었다. 교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자취를 감추었다. 엉뚱한 길로 잘못 들어섰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후에야 정국은 간신히 백반집의 누런 불빛을 찾아냈다. 


마당으로 들어선다. 빗물이 슬레이트 지붕 위로 우두두두 쏟아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구멍가게는 영업을 안 하는지 시커먼 어둠에 잠겨 있고, 얼핏 보기에도 텅 빈 식당 안에만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혹시 편의점이라도 있을까, 주인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정국이 멈칫한다. 가게 안이 지나치게 조용하다. 누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라도 보일 법한데,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이상함을 감지하고 두리번거리던 정국의 눈에 파란지붕 개집이 들어왔다. 다가가서 웅크려 앉아 안을 들여다본다. 아까 그 꼬질꼬질한 강아지가 개집 안쪽에 바짝 쪼그라든 채 꼬리를 말고 숨어있었다. 희미하게 낑낑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쭈쭈쭈. 정국이 달래며 손을 내밀어도 꿈쩍을 안 한다. 겁에 질린 까만 눈으로 쳐다보며 바들바들 떨기만 한다.


뭔가 이상하다. 일어선 정국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이 반쯤 열려 있다. 비가 고스란히 몰아쳐서 문 안쪽의 바닥이 흠뻑 젖었는데도 아무도 닫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 저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사람을 불러야 하나. 인기척 자체가 없다. 가게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 보았다. 주인이 거주하는지, 창고 같은 곳 안쪽에 작은 방문이 열려 있었다. 흐트러진 신발 몇 켤레. 기묘한 냄새가 풍겼다. 사람의 묵은 살 냄새와 지린내가 섞였다. 더 가까이 다가가던 정국은 움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사람의 손 하나가 문틀 너머로 삐죽 나와 있다.


방문 옆에 중년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정국의 반대방향을 보고 누워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배와 가슴팍이 잠잠한 것으로 보아 죽은 것 같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목이 기이한 각도로 비틀렸다. 이쪽에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하다. 바닥에는 배설물로 보이는 액체가 고여 있다. 남들보다 약간 더 큰 정국의 앞니가 사정없이 딱딱 부딪쳤다. 주먹을 꾹 움켜쥔 정국이 두 발짝 더 방문 앞으로 다가선다. 허벅지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쓰러진 중년여자의 몸뚱이 너머로, 벽을 보고 우뚝 서 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하나……아니 둘이다. 그렇잖아도 큰 정국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동공이 확장된다.


교수의 등이 보였다. 그의 긴 다리가 우뚝 선 채 오늘 낮에 보았던 백반집 주인남자를 부둥켜안고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교수의 뒤통수에 가려져 주인남자의 얼굴은 허공을 향해 부릅뜬 눈만 간신히 보였다. 으으으, 희미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교수의 어깨를 움켜잡은, 마디가 툭 불거지고 주름진 손. 발작적으로 푸들, 떨리는 몸뚱이를 단단히 고쳐 잡은 교수의 뒷목이 한 번 크게 움직였다. 그것은 마치……사랑하는 연인을 껴안고 목덜미에 키스를 하는……다정함을 한데 짓뭉갠 포옹의 광경과 흡사했다. 하지만 주인남자의 경악과 공포, 고통으로 가득 찬 눈이 허공에서 내려와 문득 자신에게 닿았을 때, 정국은 이곳이 살인의 현장임을 깨달았다. 덜덜 떨리던 남자의 손이 이윽고 교수의 어깨에서 툭 떨어졌다. 허공에서 맥없이 흔들리는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교수가 고개를 든다. 정국을 등진 채 벽 어디쯤을 올려다보며 짧은 한숨을 쉰다. 후우. 그가 손등으로 입가를 닦는다. 바닥에 액체 두 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누런 장판 위의 검붉은 액체. 피였다.


교수가 남자를 껴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축 늘어진 주인남자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더니, 망설임 없이 왼쪽으로 비틀어버렸다. 우지직, 목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났다. 정국은 입을 틀어막고 억지로 비명을 참았다. 교수가 시체를 바닥에 눕히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그는 비틀거리며 문간에서 뒷걸음질해 물러났다. 가게 쪽으로 달아나려고 몸을 돌리다 한켠에 쌓여있던 맥주상자에 발이 걸려 엎어졌다. 플라스틱 바구니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헉……!"



바닥을 짚은 손바닥에 금세 생채기가 난다. 동그란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무릎에서 올라오는 화끈한 통증을 의식할 여유도 없었다. 자신의 비명소리와 맥주상자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를 교수가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벌떡 일어난 정국은 가게로 뛰쳐나가 제일 구석진 곳에 있는 식탁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까진 손바닥에서 손목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구둣발소리였다. 의자를 방패막 삼아 식탁 그림자 아래에 온몸을 웅크리는 순간, 가게 안쪽에서 교수의 긴 다리가 불쑥 나타났다. 정국은 황급히 숨을 참았다. 긴 다리 두 개, 잘 닦여 반들반들한 구둣발이 가게 한가운데에 조용히 멈춰 선다. 꼭 정국이 어디 숨어있는지 찾아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수 초의 침묵이 흘렀다. 정국이 입을 틀어막은 채 숨소리와 기척을 최대한 죽이려 안간힘을 쓰는 죽음 같은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교수가 다시 움직였다.


그의 구두가 식당 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유리문이 열리고, 빗소리, 철벅이는 물소리, 이윽고 그는 완전히 가게 밖으로 사라졌다.


정국은 그가 아주 나갈 때까지 지저분한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어디선가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날씨가 점점 더 악화된다. 바람소리가 거셌다. 오 분쯤 더 그 자리에 숨어있던 정국은 쾅, 하고 벼락이 내리치고 나서야 비틀거리며 식탁 밑에서 빠져나왔다. 손바닥에서 뒤늦게 통증이 전해졌다. 방금 그는 교수의 살인과 흡혈을 목격했다. 꿈을 꾸는가 싶었지만 손바닥과 무릎에서 올라오는 통증은 명백한 현실의 감각이었다. 숨 막히는 위기감이 전신을 지배한다. 공포에 잠식당한 뇌는 본능적인 결론을 내렸다. 이곳에서 달아나야 한다. 우산도 챙기지 못하고 정국은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갑은 주머니에 있다. 날씨가 궂지만 어떻게든 골목을 빠져나가서 큰길로 가면 택시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차역으로 가자. 시골진 곳이지만 역에 가면 그래도 새벽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몇 명 있을 수도 있고, 최소한 역무원이 있을 것이다. 낮에 역 근처에서 작은 파출소도 분명히 보았었다. 최대한 사람이 많은 곳에 숨어서 아침 첫 차가 뜰 때까지 기다리자.


그러나 마당을 빠져나와서 아래쪽 길목으로 방향을 트는 순간부터 정국은 더 이상 뛸 수 없었다. 우뚝 멈춰 선 그의 무릎이 후들거렸다. 검은 우산을 쓴 교수가 가로등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는 듯 서 있었기 때문이다. 구식 수은등이 교수의 머리위로 희미한 빛을 떨어뜨렸다. 자신의 심장박동이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차가운 물방울이 쉬지 않고 정국의 귓등과 이마와 뺨을 내리친다.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가슴팍이 욱신욱신했다. 이 빗속에서도 교수는 여전히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방금 전까지 사막에 있다가 온 사람처럼 묘하게 건조하며 보송보송해 보였다.



"어딜 갑니까?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정국의 아랫입술이 심하게 밭았다. 공포에 질린 그의 어깨가 아래위로 숨 가쁘게 오르내렸다. 



"저, 저는……."

"……."



날카로운 교수의 시선이 그의 몸 위를 기어다닌다. 후들후들 떠는 정국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교수가 이내 지그시 웃었다. 그의 까만 우산이 벌써 비에 흠뻑 젖은 정국의 머리위로 사붓이 기울었다.



"올라가죠. 나도 마침 필요한 게 있어서 내려온 참이었는데."

"저, 저는……집에 가겠습니다."



무슨 소릴 하냐는 듯 교수가 뚫어지게 정국을 들여다보았다. 감히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정국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달싹였다.



"집에, 집에 가겠습니다."

"막차가 끊겨서 어차피 아무데도 못 가요. 오늘 밤은 거기서 자고 가는 게 나을 텐데."

"역사에서 자면……괜찮을……"

"굳이?"



굳이 가겠다고? 이 비를 뚫고? 교수가 잘라먹은 뒷말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가죽장갑을 낀 손이 말없이 정국의 어깨를 끌어당긴다. 맥없이 끌려간 정국의 어깨가 교수의 가슴팍에 바짝 달라붙었다. 어깨를 감싸인 채 정국은 덜덜 떨기만 했다. 도망쳐야 하는데, 역사로 가서, 파출소에 신고하고, 무사히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데……움직일 수가 없다. 색유리에 가려진 교수의 검은 눈을 마주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거미줄처럼 정국의 어깨를 옭아맨다. 손끝에 실린 악력은 인간의 것이 아닌 것처럼 집요하고 무거웠다.






  "돌아왔네?"



  제이가 웃으며 교수에게서 우산을 넘겨받는다. 갸름하게 휘어진 눈이 정국의 새하얗게 질린 안색을 관찰했다. 끌려오다시피 걷는 동안 내내 땅만 보고 있던 정국이 고개를 들었다. 흰자위에 핏발이 잔뜩 서 있다. 툭 치면 쓰러지겠네, 저렇게 겁을 먹어서. 속으로 혀를 찬 제이가 한옆으로 비켜섰다. 



"정말 3번 방 안 쓸 거냐?"

"안 써."



교수의 목소리가 무뚝뚝하게 굳었다. 공기 중에 미세하게 번지는 피 냄새를 맡은 제이가 눈썹을 찌그렸다. 식사를 하고 온 것이 분명했다. 떠밀리듯 신발을 벗은 정국이 교수의 손에 손목을 붙들려 복도 안쪽으로 들어간다. 들어가면서, 제이를 한 번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맹수에게 목을 물려 끌려가는 소동물의 표정이나 다름없었다. 쯧쯧. 제이는 다시 혀를 찬다. 3번 방을 쓰지 않겠다는 것은 오늘 밤 저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이 집에서 살아나갈 수 있음을 의미했다. 저 두 사람이 빌린 방에 붙은 숫자는 5번이다. 생존의 숫자 5. 3번 방에는 침대와 옷장 대신 마치 관 짜는 집처럼 커다란 나무관들이 다섯 개쯤 쌓여 있다. 그 방에 들어가면 인간은 제 발로 걸어나올 수 없었다. 


RM의 눈에 어룽져 있던 살기도 가뭄 끝에 비를 만난 더위처럼 한풀 꺾여 있었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다만 오늘밤에는 창문을 꼭꼭 닫아서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지 싶었다. 천둥번개가 요란하니까 어차피 아무도 듣지 못하겠지만. 제이는 RM이 열어두고 간 현관 쪽 중문을 닫고 작은 고리를 걸어 잠가두었다.



"……."



죽는구나.

나는 여기서 죽어.


정국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생각은 뇌리로 파고들 틈이 없었다. 너무나 명징하게 코앞에 떨어진 현실. 꿈이 아니라 실제다. 살인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범인에게 붙잡힐 경우, 목숨을 건질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범죄심리학에 문외한인 정국이라도 그 정도는 충분히 유추할 만했다. 게다가 눈앞의 이 남자, 교수, 김남준, 레이먼드, 빌, 또는 RM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 어떤 정황을 따지더라도. 


끌려들어와 침대를 마주보고 서는 순간 등 뒤에서 방문이 닫혔다. 찰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그 소리가 정국의 귀에는 뒤통수를 겨냥한 총성음처럼 들렸다. 지금 거실에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제이라는 남자도 교수와 한패이리라. 최소한 똑같이 사람의 피를 마시거나, 교수의 살인을 원조하는 동료임이 틀림없었다. 방안을 둘러보아도 딱 하나의 창문 말고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무기로 쓸 만한 것도 없다. 침대다리 하나를 괴력으로 떼어낸다면 또 모를까. 공포로 굳어가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는데 차가운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돌려세웠다.


뒷걸음질치던 정국이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형광등을 등지고 그를 내려다보던 교수가 손을 뻗어 그의 가슴팍을 뒤로 부드럽게 밀어서 눕혔다. 살얼음을 떼어낸 것 같은 피부가 뺨을 가늘게 쓰다듬는다. 손가락이 길고 손바닥도 큰 손이었다. 그 손아귀로 정국의 목덜미를 느릿느릿 감싸온다.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목덜미에 두 개나 갖다 댄 느낌이었다. 두피부터 엉덩이까지 소름이 쭉 내달린다. 양손으로 감싸 쥐었으니 그가 조금이라도 힘을 실으면 당장 기도가 막히거나 목이 부러질 게 뻔했다. 내려다보는 눈이 지나치게 검다. 부자연스러운 먹색이다. 렌즈를 꼈나? 사람이 너무 공포에 질려 미쳐가는 건지, 이 와중에도 잡생각이 든다. 언젠가 교수의 차를 얻어 탔을 때 합승했던 창백한 남자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눈도 저랬지. 속을 알 수 없는 칠흑이었지.


교수의 얼굴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온다. 정국은 문득 희미한 피비린내를 맡았다. 바닥에 떨어지던 핏방울을 상기하고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나온다.



"교수님, 저, 저는……"

"……."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진짜 못 봤어요. 살려주세요. 교수님, 저는……."



제발, 이라는 말이 나오려는 찰나 교수의 손이 목덜미에서 떨어졌다. 그의 입술이 조소하듯 가로로 길게 찢어진다.



"아무것도 못 봤다고?"

 "……."

"봤어도 별로 상관 없는데."



그의 차가운 손이 불쑥 정국의 윗도리를 들추었다. 코트 안에 껴입었던 맨투맨이 밀려올라가고 훤히 드러난 허리를 더듬었다. 손가락이 갈빗대를 지나 가슴팍까지 올라온다. 바들바들 떠는 정국의 왼쪽 가슴 위를 교수의 손바닥이 지그시 눌렀다.



"건강한 심장이네. 시끄럽게 뛰는 걸 보니."



그가 정국의 오른손을 끌어다 자신의 왼쪽 가슴팍에 마주 올렸다. 백반집에서 달아나다가 넘어져 심하게 까진 손이었다. 통증 때문에 표정을 일그러뜨리던 정국이 눈을 부릅떴다. 응당 느껴져야 할 선명한 고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잠하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이게 멈춘 지 삼백년이 넘었어."



그가 무감하게 중얼거렸다.



"맥박도 없고. 동공의 움직임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 생체반응은 시체랑 다를 게 없어. 몸이 이렇게 되는 순간 고통이 가장 큰 까닭은 그 때문이야. 쓸모없게 된 장기가 한꺼번에 속에서 녹아버리니까. 그러면 정말 단단한 껍데기만 남고, 속은 텅 빈 몸뚱이가 되지."



뱀가죽처럼 차가운 손이 다시 허리춤으로 기어내려온다. 옆구리 뒤쪽을 짚고 가볍게 누르며,



"원래는 이곳의 피가 제일 신선하지만 여긴 깨물기 어려우니까 주로 목을 물어."



다른 손이 정국의 목덜미에서 쇄골로 이어지는 어디쯤을 짚었다.



"이쯤이 가장 피하지방이 적어서 혈류를 찾기가 쉽지."



그의 검은 눈이 정국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시선을 느낀 정국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큼지막한 눈을 잠시 들여다보던 교수가 가슴팍에서 정국의 다친 손을 떼어냈다. 손바닥을 위로 뒤집어 상처부위를 자세히 살핀다. 생채기에서 흐르다 만 피가 손목에까지 말라붙어 있었다. 인간의 혈액에 예민한 점막과 비강에 피 냄새가 달라붙었다. 홀린 듯 상처를 들여다보던 교수가 혀로 핏자국을 핥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정국이 팔을 빼려고 했지만 억센 힘으로 붙들고 손바닥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의 코끝이 정국의 손금을 세게 짓눌렀다. 겁에 질린 정국이 울먹였다.



"죽이지 마세요."

"……."

"교수님, 제발……저 죽이지 마세요."



죽기 싫어요, 엉엉…… 북받쳐 오르는 두려움에 못 이겨 정국이 울음을 터트렸다. 이 작고 네모진 공간, 낯선 방의 벽 네 개가 모조리 자신을 무겁게 덮쳐오는 것 같다. 교수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웠다. 큰 손바닥으로 정국의 한쪽 뺨을 느리게 감싼다. 여유로운 손짓이었다. 필사적으로 그의 손등에 제 손을 겹친 정국이 중얼거렸다. 제발 살려주세요. 눈앞에 죽어가던 백반집 주인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공포와 고통으로 툭 불거져 나온 눈알. 부러진 목. 허공에서 흔들거리던 손. 피비린내.


그의 왼손이 정국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웃옷이 반쯤 벗겨진 맨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끌어당긴 뒤 오른손으로는 뒷목을 감싸 고정했다. 허리를 깊게 수그린 그가 불쌍하게도 오들오들 떠는 정국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옷감 너머로도 느껴지는 얼음처럼 차가운 몸뚱이에, 허벅지 안쪽까지 소름이 돋는다. 살기보다는 다정함에 훨씬 가까운 행동에 정국이 훌쩍이며 그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안 죽여. 죽일 생각 없어. 울지 마."



서늘하지만 다정한 손길이 연신 등을 쓰다듬는 것에 아주 약간 마음을 놓은 정국이 코를 훌쩍 들이마셨다. 바로 귓가에서 교수의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몸에서 힘 빼."



달래듯 말하는 소리에 정국의 어깨에서 힘이 슬슬 빠지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의 목덜미에 무엇인가 박혔다. 아주 날카로운 드릴을 피부에 대고 처박는 듯한 격통이 치밀었다. 통증이 너무 거세서 거대한 화살촉이 목을 뚫고 들어와 온몸을 관통한 뒤 발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빠져나가지 않고 다시 전신을 마구 헤집는 것 같았다. 퍼드득 몸부림치는 정국을 두 팔이 억세게 휘감았다. 바짝 달라붙은 교수의 석고상 같은 몸뚱이가 정국을 바위처럼 묵직하게 짓눌렀다. 밀어내려고 해도 밀리지 않는다. 고통에 못 이긴 정국의 손톱이 교수의 어깨와 등 위쪽을 마구 할퀴었다. 침대 매트리스에 짓이겨지다시피 파묻힌 정국의 목덜미에서 무언가 빨려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쇄골에 닿은 교수의 목울대가 쉼 없이 오르내렸다. 그가 무엇인가를 자신의 목에서 빨아내고 있었다. 그것이 피든, 생명이든……


입가가 찢어질 만큼 한껏 벌어진 입에서 어마어마한 비명소리가 온 집안을 뒤흔들었을 것이다. 눈물 때문에 뿌얘진 시야로 언뜻 방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집주인이 들어선다. 침대에 엉킨 두 사람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아이고, 애 잡겠다 애 잡겠어. 혀를 차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을 뿐이었다. 울컥, 목에 난 상처에서 큰 덩어리 같은 것이 넘어간다는 느낌이 고통 너머로 전해지는 순간, 까무룩 시야가 어두워지며 정국은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뜬 것은 며칠이나 지났는지 알 수 없을 때였다. 자신이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희미한 시야에서 뻑뻑한 느낌을 걷어내기 위해 팔을 드는 순간 정국은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오래 잠들어 있었던 모양인지 눈이 퉁퉁 부었다. 아프다. 목 뒤도 뻐근하고 옆구리, 엉덩이, 다리, 심지어 발가락까지 저렸다. 철심 몇 개에 관통당한 기분이었다. 고통스러운 빛이 눈꺼풀 안으로 파고들어와 시야에서 노랗고 하얀 동그라미로 뭉개졌다.


불이 켜진 실내공간이었다. 자신이 어디에 누워있는지 파악하는 것조차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천천히 인식되는 천장. 미색 천장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다. 벽도 같은 색깔이다. 한쪽 벽에 우뚝 서 있는 조그만 옷장, 그 외에는 아무런 가구도 없는, 여전히 황량한 방안을 찬찬히 인지하는 순간 그제야 정국은 자신이 아직도 그 집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이 그를 에워쌌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픈 와중에도 토막 난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모두 환상이고 잘못된 꿈같다. 그는 분명 살인을 목격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이었다. 백반식당 뒷방에 쓰러져 있던 중년여자, 목이 비틀려 죽어간 주인남자. 정국이 발견할 때까지만 해도 그 남자는 살아있었다. 그를 죽인 것은 정국이 잘 아는 인물이었다. 교수. 김남준. 윌리엄 또는 레이먼드. RM. 정국은 그가 사람의 목에서 피를 빠는 것을 분명히 보았고, 그를 피해 달아나려다 붙잡혔으며, 여기 이 방으로 끌려들어와, 교수의 손에 의해……


벌떡 일어나려는 정국의 어깨를 차가운 손이 불쑥 잡아 눌렀다. 그리 강한 힘이 아니었을진대, 부드럽게 떠미는 무게에 정국의 상박이 도로 침대에 눕혔다.



"깼어?"



교수의 목소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게 정국을 더 공포에 질리게끔 만들었다. 눈만 굴려 침대 옆을 건너다본다. 어딜 나갔다 온 건지 교수는 예의 그 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방안인데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방에 있는 유일한 창문에는 커튼이 촘촘히 쳐져 있었다. 심지어 블라인드까지 내렸다. 온몸이 아픈 것을 보면 아직 죽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나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거지? 초조하게 눈을 굴리는 정국의 속내를 읽었는지 교수가 가죽장갑을 벗으며 대답했다.



"이틀 정도 기절해 있었어. 머리가 아플 텐데. 제이가 약을 갖다줄 거야."



그가 침대 곁으로 다가서자 정국의 얼굴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후욱, 정국은 가쁘게 내쉬는 자신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손끝 하나 마음대로 까딱할 수가 없었다. 교수가 나타나면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퍼진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그를 의식하고 주박에 묶인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온 교수에게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향수 냄새라고 생각했는데……아닌 것 같기도 했다. 말려서 짓이긴 꽃향기와 비슷했다. 그가 무엇인가 더 말하려는 순간 침대 아래쪽, 방구석에서 또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인간이잖아요?"



약간 의아해하면서도 불만에 찬 어조였다. 어둠에 싸인 구석에서 누군가가 움직였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정국과 또래로 보였으나 머리카락이 한 올도 남김없이, 방안의 조명보다 배는 더 휘황하게 빛나는 황금색이었다. 교수보다 체구가 훨씬 작았다. 책을 읽고 있었는지 한 손에 소설로 보이는 양장본을 들고 교수 옆으로 와 선다. 정국을 빤히 내려다보는 눈초리가 길고 날카로웠다. 그를 마주 올려다보며 정국은 숨을 죽였다. 길게 빠진 눈꼬리 안의 눈동자가 찬란한 푸른색이었다. 비가 한바탕 쏟아지고 난 뒤 맑게 갠 여름하늘의 색. 정국의 놀란 시선이 머무르는 것을 느꼈는지 남자가 도톰한 입술을 삐죽인다.



"먹을 것도 아니면서 왜 데려왔어요?"

"내 권솔이야."

"인간을요?"

"아직은."

"아직은? 그럼 반만 넣었다는 거예요? 왜요?"



예민하고 차갑던 무표정이 금세 둥그렇게 풀어진다. 놀란 얼굴이 한결 어리고 유순해졌다. 어리둥절한 남자가 교수의 뒤통수와 옆얼굴을 끈질기게 바라보았지만 교수는 대꾸 없이 정국의 목덜미에 손가락을 얹었다. 갑자기 목에서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으으…… 가늘게 신음하며 정국이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렸다. 불에 타는 듯 쓰라리고 아픈 부위를 감싸자, 손바닥에 피부의 균열이 닿았다. 아픔으로 눈이 그렁해진 정국은 조심스럽게 상처부위를 매만졌다.


작은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었다. 필시 잇자국이었다. 손가락을 확인했지만 피는 묻어나오지 않았고, 물린 부위가 지나치게 뜨거웠다. 그젯날 밤 교수에게 물어뜯긴 곳이었다. 물렸을 때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꿈이 아니구나, 꿈이…… 울컥 눈물이 터진 정국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다른 손으로는 교수가 만지지 못하도록 상처를 덮었다. 혼나고 침대로 숨어든 아이처럼 잔뜩 오그린 채 훌쩍훌쩍 우는 정국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미간을 구겼다.



"아무것도 말 안 해주고 데려온 거예요? 권속 필요없다면서요?"

"……."

"RM 형."



묵묵하다. 짧게 한숨을 쉰 남자는 구석에 놓인 의자로 돌아가 걸터앉았다. 그리고 읽던 책에 마저 집중했다. RM은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는 창가로 다가가서 커튼과 블라인드 너머의 가는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 이쯤이면 올 시간이 다 됐다. 권속을 거느리려면 연맹에서도 동등한 위치에 있는 최소 네 구 이상의 동족에게 인정을 받아야 했다. 집주인인 제이는 거의 늘 여기 있고, 둘은 RM과 똑같이 서울 어딘가에서 평범한 인간인 체 살고 있으며, 나머지 하나는 열흘 정도 홀로 유럽을 돌아다니다가 어제 귀국한 참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그가 기다리던 새로운 인물이 들이닥친다. 성량 좋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그를 불렀다.



"빌!"



그의 수많은 이름 가운데서도 가장 잘 쓰이지 않는 애칭이었다. 자신을 이렇게 부르는 이는 흔치 않다. 정국 역시 어렵잖게 새로운 인물을 알아보았다. 몇 달이 지나더라도 저 얼굴은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덥수룩하고 푸석푸석한 은회색 곱슬머리. 한쪽 귀에는 피어싱이 길게 늘어졌다. 언젠가, 교수의 차를 얻어 탄 날,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교수에게 건네주었던 그 귀걸이였다. 그때 남자는 귀걸이의 주인이 귀를 물어뜯겼다고 전했었다. 먹이에게. 그들의 먹잇감에게. 일반적인 음식보다 인간의 피를 주식으로 삼고, 빛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몸놀림과 힘이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들의 '먹잇감'이란 필시 살아있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저 남자는 먹이로 삼은 인간에게 귀를 물어뜯겼던 것이다. 마지막 반항으로. 죽어가는 약체의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그것을 깨닫자 등골이 서늘해진다.


남자도 정국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를 드러내고 웃자 입매가 모서리 둥글린 네모모양으로 벌어졌다. 유난히 날카로운 송곳니가 반짝이는 것보다 그의 눈동자 색깔이 더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자처럼 노란 호박색 홍채가 너무 지나치게 번쩍여 금빛으로 보이는 것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정국은 또 하나를 깨닫는다. 저 기이한 색깔은 렌즈도 어떤 속임수도 아니라는 것을. 



"어, 너 왔구나!"



남자는 정국이 이곳으로 올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외쳤다. 웃는 얼굴이 유순하다 못해 천진난만했다.



"빌이 너 되게 좋아해서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방구석에서 금발머리 남자가 알긴 뭘 아냐, 투덜거린다. 그는 개의치 않고 정국의 몸 위로 고개를 수그려 코까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너 되게 단 내 난다. 냄새 쩔어. 웅얼거리는 그의 어깨를 정국은 안간힘을 다해 밀어냈다. 뒤로 밀려난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옴마? 라고 중얼거렸다. 침대보를 쥐어뜯어가며 정국은 필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뛰어야 한다. 뛰어야 해. 지금이라도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갑자기 세계가 기우뚱 뒤집어졌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방안에 모인 이들의 오색눈동자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도망치는 그를 구경한다. 지켜보기만 한다. 턱없이 느린 그를 충분히 제압하고 붙잡을 수 있을 텐데도, 이상하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교수는 여봐란 듯이 팔짱을 끼고 있다. 지켜보겠다는 거지. 정국은 이를 악물었다. 비틀거리며 방밖으로 나오던 그의 어깨가 누군가와 부딪쳤다. 집주인 제이였다. 선명한 에메랄드빛 홍채가 탐스러운 빛을 냈다. 전날 밤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어? 아직 안 나았을 텐데?"



그가 눈을 치켜뜨며 중얼거리는 것도 지나쳤다. 도망치자. 도망치자. 여기서 달아나자. 살인마들이 우글거리는 소굴에서 달아나자. 귀신이든, 인간이든, 뭐든……일단은 살아서 여길 나가야 한다.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심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전신이 욱신거리는 것을 견뎠다. 허청허청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갔다. 아무도 없다. 지나치게 밝던 전등도 다 꺼졌다. 거실 한쪽 벽을 다 차지한 유리에도 커튼이 굳게 드리워져 있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될 법도 했지만 죽기살기로 달아나는 정국의 머릿속에는 그 따위 것 끼어들 여력이 없었다. 현관으로 나가서 문손잡이를 돌렸다. 잠겼다. 아무리 당기고, 잡히는 대로 모든 잠금장치를 조였다 돌렸다 풀었다 해보아도 소용없다. 굳게 닫힌 철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정국은 허겁지겁 돌아섰다. 돌아서다가, 또 한 번 크게 휘청거렸다. 발목을 삐끗했는지 새로운 통증이 찾아왔다. 주방과 거실 가운데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층계를 발견했다. 기다시피 따라 올라간다. 턱이 높아서 손으로 계단참을 일일이 짚으며 올라가야 했다. 위층에 있는 것은 방이 아니었다. 옥상이었다. 불투명하고 두꺼운 유리문을 있는 힘을 다해 열어젖혔다. 다행히 잠겨있지 않았다.


어느 틈에 양말까지 벗겨진 정국의 맨발이 옥상의 콘크리트 바닥을 간신히 디디고 섰다. 빈 옥상에는 그 흔한 물탱크조차 없다. 바람이 분다, 바깥공기의 냄새다, 생각이 들기도 전에, 강렬한 햇빛이 정국의 얼굴을 찔렀다. 눈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팠다. 아니 온 얼굴이, 옷감 너머로 햇빛이 닿는 모든 피부가 화끈거렸다.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이 쓸렸다. 가벼이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조차 칼날처럼 피부를 스친다. 공기 중에 스민 모든 냄새, 어디선가 맡아지는 바닷물의 비린내와 무언가가 타는 냄새와 나무, 수풀 냄새, 심지어 골목길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 떠돌이 개들의 털 냄새까지 예민하게 코를 들쑤셨다.



"아, 아파……."



너무 아파…… 있는 대로 몸을 옹송그린 정국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파서 눈도 못 뜨겠다. 엎어진 그의 등 뒤로 두 사람이 따라 올라온다. 비온 뒤 갓 갠, 오늘의 하늘보다 더 새파란 눈을 가진 작은 체구의 남자와 집주인 제이였다. 둘 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느릿느릿 계단을 올라서 옥상으로 나왔다. 정국은 눈물 때문에 흐려진 눈으로 헐떡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어설 수가 없다. 온몸이 진짜로 타들어가서 흰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환상까지 비친다. 태양빛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던가? 어제 물렸던 자리가 너무 아파서 환통을 느끼는 건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바닥을 긁는 그의 손톱 밑 생살이 벗겨져 빨갛게 피가 맺혔다.



"아, 저 아까운 걸."



손가락으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보며 제이가 입맛을 다셨다. 금발 남자가 경고하듯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푹 쑤신다. 그새 옥상 난간에도 두 명의 인영이 올라앉았다. 호박색 눈의 남자와……정국은 분간하기 위해 애썼다……교수의 차 뒷좌석에 늘어져 있었던 창백한 얼굴의 남자. 이제 그는 마른 페인트처럼 부자연스러운 검은색 눈이 아니었다. 늑대처럼 새하얀 홍채가 햇빛 아래에서도 번득인다. RM은 가장 마지막으로 그곳에 나타났다.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발소리조차 없이 다가온 그는 긴 다리를 접어 정국의 곁에 웅크리고 앉았다. 더 이상 피 냄새는 나지 않는다. 대신 기이한 꽃향기 같은 것을 다시 한 번 맡았다. 이전에는 맡지 못했던 냄새였다.



"당분간은 햇빛 아래 돌아다니는 게 좀 버거울 거야."



적응하기 전까지는. 속삭이듯 덧붙인 그가 정국의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창처럼 따가운 햇살이 곧장 안구에 비쳐들자 정국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RM의 손가락이 다정하게 눈물자국을 문질러 닦아냈다. '치사량'의 절반에 달하는 체액을 핏줄 안으로 흘려넣었으니 이제 다시는 보통의 인간으로는 되돌아가지 못하리라. 그는 손가락이 닿은 정국의 피부 아래에서 자신의 체취를 감지하고 미친 듯이 고동치는 심박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네 눈은 나와 같은 색깔이 될 테고."



RM이 고개를 숙여 정국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햇빛이 가려지자 한결 살 것 같다. RM의 몸에서 풍기는 묘한 꽃향기를 맡는 순간부터 이미 몸의 통증이 천천히 가시는 중이었다. 정국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흐리던 시야가 거울처럼 다시 맑아진다. 


RM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두 사람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겨우 한 뼘이나 될까 싶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정국은 헐떡이면서도 그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말없이 그의 눈을 들여다보던 RM이 그때껏 끼고 있던 선글라스로 손을 가져갔다. 



"<붉은 살인자>는 일종의 자서전이기도 하지."



그가 긴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벗었다.



"RM의 직역이니까."



색유리에 가려져 있던 그의 두 눈동자가 드러났다. 바싹 마른 정국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Red Murderer."



갓 흘린 피처럼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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